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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넘어 전체와 소통하자

자아를 넘어 전체와 소통하자

 

글쓴이 : 서재영

 

(생략)

 

모든 존재는 개별성을 갖고 있으나 동시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승조(僧肇)하늘과 땅은 한 뿌리이며(天地與我同根), 모든 존재는 나와 한 몸(萬物與我一體)”이라고 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치를 부처님은 연기(緣起)’라고 설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아라는 독자적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 매달린다. 그런 인식으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양변이 생겨나고, 나와 너라는 구별 짓기가 나타난다. 허구적 인식이 만들어낸 양변이라는 울타리가 게토(ghetto)처럼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다.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로 바라보면 공명조의 두 머리처럼 상대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하고, 마침내 어리석음의 독기로 인해 공멸의 길로 가게 된다.

 

머리로 대변되는 아상이 아니라 몸통으로 대변되는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보면, 오른쪽이 먹어도 사는 길이고 왼쪽이 먹어도 사는 길이다. 모두가 하나라는 안목을 가질 때 비로소 오른쪽도 왼쪽에게 양보할 줄 알고, 왼쪽도 오른쪽의 먹이활동을 존중할 수 있다. 여기서 나 중심의 아상은 해체되고 전체를 조망하는 넓은 안목이 열린다. 따라서 중도는 존재의 연기적 전체성을 깨닫는 지혜이며,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성찰하는 지혜이다. 그런 지혜에 눈뜰 때 아상이 만들어낸 인식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고, 양변이라는 단절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언덕에 오를 수 있다.

 

모든 존재는 분절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존재의 실상을 불이중도(不二中道)’라고 한다. 너는 나로 인해 있고,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하는 전체성을 체득하는 안목이 불이중도이다. 불이중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남을 고립시키는 아상이라는 울타리를 부셔야 한다. 아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지만 세상을 나누고 대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너로 구분 짓는 경계를 허물고 전체성을 실현하는 중도의 논리에 대해 지의(智顗)쌍차쌍조(雙遮雙照)’를 제시했다. 나와 너라는 분별적 인식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 쌍차(雙遮)’이다. 나와 너라는 경계가 사라지면 전체성이 드러나므로 너와 내가 오롯하게 긍정된다. 그렇게 전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법장(法藏)은 중도를 쌍민쌍존(雙泯雙存)’으로 설명했다. 너와 나라는 두 극단이 사라지면 너와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너와 내가 아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쌍지쌍관(雙止雙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나라는 생각을 멈추고, 너는 너라는 생각을 멈추는 동시적 멈춤이 쌍지(雙止)’이다. 너와 나를 동시에 멈추면 그때 너는 나를 볼 수 있고, 나는 너를 볼 수 있는 동시적 조망이 쌍관(雙觀)’이다.

 

이렇게 보면 중도의 시작은 아상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아상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우주와 연결된 전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중도의 길은 나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너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인식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인식의 감옥에서 해방될 때 우리는 우주적 넓이를 가진 존재로 거듭난다. 결국, 중도는 나와 너를 가르는 단절의 강을 넘어 전체성의 언덕에 오르는 것이며, 존재의 실상을 보는 걸림 없는 안목[觀自在]을 갖는 것이다.

 

중도는 난해하여 실현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모두가 우한을 탈출할 때 환자를 돌보기 위해 우한으로 달려간 의사들이 있었다. 간호사들은 진료에 진력하기 위해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다. 교민 철수를 위한 특별기가 편성되자 순번도 아니었던 베테랑 승무원들이 자원하여 날아갔다. 나만 살겠다고 아우성일 때 남을 배려하고, 자비의 마음으로 양보하고, 공존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중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출처 : 불교평론, 20219월호(http://www.budreview.com)

2021.09.26 08:25:41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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