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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의미와 관념

보살의 의미와 보살 관념의 출현

 

안성두의 대승의 보살사상

 

보살 사상이 어디서 등장했는가를 다루기 전에 먼저 보살이란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보살(菩薩)이란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임말로 이 음사어에 대응하는 산스크리트어는 ‘bodhisattva’이고, 빨리어는 ‘bodhisatta’이다. 이에 따라 보살의 의미를 풀이한다면, 각유정(覺有情)이란 한역이 보여주듯이 보리를 향한 중생또는 보리에 [헌신하는] 중생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하르 다얄(Har Dayal)은 보살사상에 대한 고전적 명저인 불교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보살의 교설’(The Bodhisattva Doctrine in Buddhist Sanskrit Literature, 1932)에서 bodhisattva라는 단어가 약 7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중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는 (2) 보리를 향한 유정, (6) 빨리어 ‘satta’의 잘못된 산스크리트 표기로서, ‘보리에 헌신하거나 집착하는 자그리고 (7) ‘보리를 향한 힘이나 에너지, 용기를 가진 자이다.

 

다얄은 (7)의 의미를 베딕 산스크리트 ‘satvan’영웅, 용사와 관련시킨다. 보살의 티벳역인 보리를 향한 용감한 마음을 가진 자’(Byang chub sems dpa’)에서 이것과 비슷한 아이디어가 나타나며, 또한 팔천송반야경1장에서 보살을 굳건한 갑옷을 입은 자로 묘사하는 표현과도 상통할 것이다.

 

그런데 보다 주목해야 할 용법은 (6)이다. 상응부(SN III 190,3)에서 ‘satta’가 오온에 집착하거나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의미에 의거해서 ‘bodhisatta’의 의미는 보리에 헌신한, 매달린이라고 하는 해석이 이미 20세기 초에 제안되었다. 미산웅일(梶山雄一)은 빨리어 주석자들도 ‘bodhisatta’보리에 매달린 자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 의미가 보살의 원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런 해석은 훼터(T. Vetter)와 슈미트하우젠(L. Schmithausen) 등에 의해 폭넓게 지지받았다. 특히 훼터는 중세 인도어 ‘bodhi-satta’는 산스크리트 ‘bodhi-sakta’에 대응하지만 이를 ‘bodhi-sattva’라는 산스크리트 형태로 바꾼 것은 ‘sakta’집착된이라는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보살에 대한 어원 해석까지 포함하는 상세한 설명을 하는 까닭은 보살 관념이 한두 개의 의미로 소급될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여러 원천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역자들이 ‘bodhisattva’를 보리살타(菩提薩埵)라는 음사어로 표시한 것도 이 단어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단일한 맥락에서 이해되거나 확정될 수 없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보살 관념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보살 관념의 형성에서 불교 내적인 요소와 외적 요소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 외적 요소로 지적된 것은 마하바라타' 등의 힌두문헌에 나타나는 행위의 요가의 측면과 페르시아 종교로부터의 영향이다. 역사적으로 불교 사상은 불교외적 요소들도 수용하여 이를 불교적 맥락에서 변용시켜 왔기에 보살 관념의 경우도 그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문화공간으로서 인도에서 그 영향관계는 적어도 일방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천상적 보살의 유래와 관련해서 지적되는 조로아스터 교리로부터의 영향도 현재까지 확정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내적 발전이란 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보살이란 단어가 베다 문헌에 나오지 않고, 처음으로 상좌부 니카야(Nikāya)에서 정각을 얻기 전의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보살 관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상좌부 경전에 나타나는 보살을 니카야 보살이라고 부르고, 그 유형을 보자.

 

니카야 보살은 정각 이전에 보살이었을 때라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그 보살의 용어는 현생에서 정각을 위해 수행하는 경우나, 또는 전생의 공덕으로 인해 무수한 공덕을 갖추고 태어난 경우에 모두 사용된다. 먼저 전자의 의미에서 보살은 고타마가 불선한 마음의 상태를 극복하고,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발전시키는 수행맥락에서 주로 사용된다. 불선한 마음의 상태는 주로 감각적 욕망으로, 샤마타는 수식관의 수행과 이로 인한 신통력의 획득으로, 그리고 비파샤나는 고통의 의존적 생기와 오온, 12처 등의 관찰로 기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니카야 보살은 정각을 얻은 후에 붓다가 가르치신 근본 교법에 따라 수행하는 불교승려의 이상형에 다름 아니다. 이는 위에 언급한 정형구에서 재가의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출가를 해탈을 향한 노력의 토대로 보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렇다면 니카야 보살은 어떤 동기에서 붓다가 되려고 했을까? 대승의 보살과 같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현하기 위해 보살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는가? 니카야의 한 구절(M I 163)은 늙어감과 죽음에 종속된 보살이 늙어감과 죽음을 여읜 위없는 평화인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날라요(Anālayo)는 이 구절이 니카야 전체에서 보살이 열반을 위해 출가하겠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곳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에서 타인에 대한 고려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는 붓다가 된 직후에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범천 권청의 에피소드에서도 나타나듯이 붓다는 처음에 타인을 위해 가르치기를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망설임이 중생들에 대한 자비로운 붓다의 이미지와 맞지 않기 때문에, 초기경전의 편찬자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이를 변호하고자 하며, 심지어 보살지는 범천의 권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청하자마자 수락했다면 이는 범천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설명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이 너무 심오하기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범천의 권청을 거절했다는 설명이다. 나는 이 이유가 철학적으로 가장 함축성이 풍부하고 또 후대 대승의 주장과 연결될 소지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도 이타행으로서의 설법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자 보살의 경우 니카야 보살은 우리에게 친숙한 대승불교의 이타성의 모델로 나타나지 않고, 상좌부 전통에 따른 이상적인 인물로서 자신의 정신적 완성을 일차적 목표로 하여 노력하는 자로 묘사된다. 이런 자리의 추구는 자체로 존경할만한 일이고, 그가 불교사원 내에서 살아가는 승려라고 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사원을 넘어 많은 재가신자들을 포섭해야 했을 때, 이런 니카야 보살의 이념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sdahn@snu.ac.kr

 

[출전 : 1617/ 2022119일자 / 법보신문]

2022.01.19 14:53:44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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