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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과 보시
월호스님 논설위원·행불선원장
육조 혜능선사는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을 듣고, 곧 마음이 열려 깨쳤다고 한다. 머무는 바 없음은 바로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여섯 가지 대상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들이 실체가 없음을 통찰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즉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다만 변화하는 현상으로서 잠시 스쳐지나갈 따름이다. 마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처럼 찰나 생멸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몸은 몸이 아니며, 몸이 아닌 것도 아니다. 다만 이름이 몸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낌도 느낌이 아니며, 마음도 마음이 아니며, 법도 법이 아니다. 다만 이름이 느낌· 마음·법일 뿐이다.
이렇게 머무는 바 없음을 연습하는 것이 대면(對面)관찰(觀察)이다. 몸에 대해 몸을 보고, 느낌 대해 느낌 보고, 마음 대해 마음 보고, 법에 대해 법을 본다.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한다.
예컨대, ‘달마가 걸어간다. 달마가 머무른다. 달마가 앉아있다. 달마가 누워있다.’라고 관찰한다. 나아가 ‘달마가 태어났다. 달마가 늙어간다. 달마가 병들었다. 달마가 죽어간다.’라고 관찰한다. 이것이 생사해탈이자, 중생제도다.
이어서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내라는 것일까? 머무르지 않고 베푸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온 세상을 일곱 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 베푸는 공덕보다 경전 가운데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라도 남들에게 가르쳐주고 설명해주는 공덕이 훨씬 더 크다. 또한 게송을 전해주는 것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몸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공덕이 뛰어나다. 왜 그런가? 현상(現相)에서 벗어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몸은 생·노·병·사하고 마음은 생·주·이·멸하지만, 본성인 관찰자는 상·락·아·정이다. 항상 하고, 행복하고, 불성인 내가 있고, 청정하다. 재보시나 몸 보시는 현상을 충실히 하는 결과를 낳고, 법 보시는 본성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는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출전 : 불교신문3424호/2018년9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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