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통도사에서 가장 높은 산내암자 백운암(白雲庵)에
홍안의 젊은 스님이 홀로 경학(經學)을 공부하고 있었다. |
장차 훌륭한 강백(講伯)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스님은 아침 저녁 예불(禮佛)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경(經)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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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산기슭 군데군데에 잔설이 남아 있던 어느 봄날, |
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
문득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
"스님, 계십니까?" |
"뉘신지요." |
문을 연 스님은 이번에는 귀가 아니라 눈을 의심했다. |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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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 이렇게 깊은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
"소녀, 친구들과 나물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찾아 보았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에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 왔습니다. |
어려우시더라도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
"사연인즉 딱하나 소승 아직 젊은 나이에 혼자 수행 중이고
방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으니 매우 난처하군요." |
"하오나 스님, 이 밤에 소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
소녀의 간곡한 청을 들은 스님은 어두운 산길에 처녀를 혼자 돌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난처하긴 했으나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준 스님은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
스님의 경 읽는 음성은 낭랑했다. |
고요한 산 중에 울려 퍼지는 그 음성은 마치 신비경으로 인도하듯 처녀를 사로 잡았다. |
처녀는 그 밤부터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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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처녀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 왔으나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사모하는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 마침내 처녀는 병을 얻게 됐다. |
마을에서 지체있는 가문의 무남독녀인 처녀는 좋다는 약을 다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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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해 안타깝기만 했다. |
"얘야, 네 소원을 다 들어 줄테니 어찌된 연유인지 속 시원히 말해봐라." |
처녀는 지난 날 만났던 젊은 학승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
사연을 들은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
"스님, 스님이 아니면 제 딸이 죽습니다." |
"한 생명 건지신다 생각하시고 제 딸과 혼인해 주십시오." |
아무리 애걸 하여도 젊은 스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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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얼마 안가서 처녀는 병이 깊어져 죽게 됐다. |
"어머니, 소녀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불효를 용서 하십시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님 얼굴 한 번만 보고 죽는다면 소녀 원이 없겠사옵니다." |
그 소식을 들은 스님은 마음 속으로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처녀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
처녀는 그만 한 맺힌 가슴을 안고 눈을 감았고, 그 뒤 영축산 호랑이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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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여러 해가 또 지나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하여 드디어 산중 강사의 영광을 누리게 됐다. |
연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거센 광풍이 일면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순삭 '휘익'하고 큰 호랑이가 감로단 지붕을 이리저리 뛰는 것이 아닌가. |
'어흥, 어흥' 호랑이는 문을 할퀴면서 점점 사납게 울부짖었다. |
대중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이변일세, |
필경 대중 속에 누군가가 저 호랑이와 무슨 사연이 있을 걸세" |
"그렇다면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보세. |
그럼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이 아닌가" |
연회석에 참석한 스님들은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다. |
호랑이는 하나씩 받아서 그냥 옆으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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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마지막으로 새로 취임하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면서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
대중들은 강백이 바로 호랑이가노리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아무도 말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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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 스님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
"이는 아무래도 소승의 속세 인연인가 봅니다." |
말을 마친 스님은 합자 예경하고 바깥 어둠 속으로 뛰어 나갔다. |
아무도 스님을 말리려 들지 못했다. |
호랑이는 강백을 나꿔채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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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대중은 강백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
깊은 골짜기마다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강백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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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백 스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심볼'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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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血)을 늘려야겠다고 하여
큼직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놓게 되었다. |
이를 호혈석(虎血石), 호석(虎石)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산신각에서 20m 남쪽 웅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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