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워인터뷰 - 금당사 회주·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관료를 우대했던 조선시대의
뿌리깊은 ‘500년 DNA’ 박혀
우리는 아직 출세지향의 사회
윤 대통령, 원칙·소신의 국정
지금보다 소통 · 대화 넓혀야
야, 수 많다고 입법독주 말고
국민을 위해 여권과 소통해야
인터뷰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대중에게 한 말씀 해 주길 청했다. 그는 “무슨 한 말씀이냐. 그냥 와서 절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직전(제36대) 총무원장인 벽산 원행(碧山 圓行·72) 스님. 그는 지난해 9월 원장 소임을 마친 후 전북 진안 금당사(金塘寺)에 내려가 회주(會主·사찰의 어른 스님)로 자리하고 있다. 수행승으로 돌아간 스님은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싶지 않으나,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는 내자불거(來者不拒)의 태도로 차담(茶談)을 허락했다. 지난 19일 금당사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환해 보였다. 특유의 친근하면서도 겸허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다짐을 하는 게 부처님 오신 날의 뜻”이라고 했다. 세속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절제하면서도 “권력 주변에 ‘정치 건달’이 넘쳐난다”며 탄식했다. 국가의 혼(魂)을 생각하며 대승적 차원에서 여야가 소통할 것을 당부했다. 불교사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답게 “한국 선불교의 큰 산맥인 경허(鏡虛·1849∼1912) 선사가 녹두 장군 전봉준(1855∼1895)의 딸을 금당사에 피신시켰고 장군의 유해를 거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는 등의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했다.
―오랫동안 종단 중책을 맡다가 산사로 돌아왔는데 어떤가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산에 들어오니 참 좋아요. 50년 전 출가했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왔으니까요. (세상과 종단의) 시비에 관여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인생의 마무리를 잘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따져보니 불기(佛紀) 2567년이더군요. 그리스도 탄생이 기점인 서기(西紀)보다 500여 년 앞서네요.
“불기는 부처님 열반 때부터 따집니다. 태어나신 걸로 하면 80을 더해야 하니 2600년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라며 언필칭 1700여 년 전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1세기 중반에 김해 가락국에 와서 허황후가 됐다는 가야 불교를 고려하면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또 제주 영실(瀛室) 존자암 이야기도 있어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발타라 존자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걸 보면 부처님 생존 시에 불교가 들어온 셈이지만, 역사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중국 현장법사가 서기 700년대에 인도에 가서 유식사상(唯識思想·마음에 의하여 모든 것이 창조된다는 불교 교리)을 들여온 것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백제엔 그보다 200년 앞서 인도에서 직접 들어왔습니다. 인도에 유식학이 퍼졌을 때 미륵불교가 성했는데, 백제에 미륵불교가 자리잡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과 갈등에 시달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 종교도, 학문도, 경제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결여되면 욕심이 생겨 다른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합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달이 생기지요. 이기주의 탓에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 일어납니다. 국가와 민족의 틀에 갇힌 욕심으로 인해 전쟁과 무역 마찰 등이 일어납니다. 지구가 수백 번 없어질 수 있는 핵무기로 이웃을 위협합니다. 이 모든 게 동체대비 보살 정신이 결여된 탓입니다.”
―동체대비 사상을 회복하는 게 부처님 뜻이라는?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말과 같지요.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하잖습니까. 세계는 하나의 꽃입니다. 천지와 나의 뿌리가 같습니다. 내가 있어 네가 있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모두 인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내 것으로 여기는 동체대비 사상이 이 연기법에서 나왔습니다.”
원행 스님이 금당사 설법전에서 경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무릇 종교인은 세간, 출세간을 구별하지 말고 ‘깨달음의 사회화’를 실천하며 세상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진안=곽성호 기자
“모든 종교인은 사회에 봉사·회향 의무 있어… 그것이 곧 부처님의 뜻”
‘불법’은 처음부터 속세에 존재
세상을 떠나 찾는 건 어불성설
‘수행 깨달음’ 세간서 실천해야
더불어 살아가는 의식 결여 땐
욕심 커지고 타인의 자유 억압
우크라 사태 역시 이기주의 탓
이웃의 아픔 내 것처럼 여겨야
―원각사 무료급식소에 성금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나네요.
(원행 스님은 지난해 12월 속가의 모친 김호인 여사 장례식장에 조문을 온 원각사 무료급식소 대표 원경 스님과 민일영 전 대법관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하이고, 그걸…. 영가(靈駕·불교에서 이르는 영혼) 이름으로 한 것인데, 작아서 미안합니다. 민 전 대법관과 원경 스님이 무료급식소를 위해 헌신하고 계셔서 참 고맙습니다. 제 은사이신 월주(月珠·1935∼2021) 스님께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말씀하셨잖아요.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을 세간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법은 세간에 있는데 세상을 떠나 깨달음을 찾는 것은 토끼에게서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지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니 모든 종교인은 사회에 봉사하고 회향(廻向·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돌림)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가 부처님 오신 날 축하 메시지를 냈더군요.
“그랬습니까. 고마운 일입니다. 이처럼 이웃 종교를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절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서로 배타하고 갈등하려면 차라리 없어져야 인류가 평화로울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을 할 때 7대 종단 대표들과 이웃 종교 순례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순례에 앞장서며 종교 간 화합에 특별히 힘썼던 분이 천주교 김희중 대주교입니다. 교구장에서 퇴임하셨다던데, 전화라도 드려야 할 텐데….”
그는 여기서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던 역사를 되돌아봤다. “유교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탄압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가 죽었습니까. 조선조가 망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더 죽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가 2013년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의 배경이 조선조이고, 주제는 종교 화해이다. 조선 초기에 유학자들의 불교 탄압 논리에 맞서 그 부당성을 지적한 함허 득통(涵虛 得通·1376∼1433) 선사의 저술 ‘현정론(顯正論)’을 연구한 것이다. 유교를 숭상하기 위해 불교를 억압하는 행위가 얼마나 부당한지를 고찰한 것이 현정론이다.
“제가 어쭙잖게 학문을 한다며 들여다본 것입니다. 함허 득통의 반론에도 조선조는 500년 동안 불교를 탄압했습니다. 승려는 팔천(八賤·여덟 부류의 천민)에 속했고, 모두 엎드려 죽은 시늉을 하며 살아남았습니다. 왜란과 호란 때 승병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조정은 혼란이 수습되자 다시 불교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때 백곡 처능(白谷 處能·1617∼1680) 스님이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 현종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제목으로 8000자가 넘는 장문의 글을 썼지요. 조선조에서 배불정책에 항거한 유일한 상소입니다. 다행히도 현종이 그걸 받아들여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대표 사찰인 봉은사와 봉선사가 폐찰되지 않고 살아남게 되지요.”
―현재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입니다. 종교 갈등이 없다는 점에서 세계 모범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걸 피가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집안 식구들끼리 이야기하다가도 다툼이 일어날 듯 싶으면, 이제 그만하자며 멈추니까요. 외국에서는 가족 간 종교 갈등으로 칼부림도 한다지만, 우리는 그런 일이 드물지요. 아직 남아 있는 혈연사회의 순기능이라고 할까요.”
―세대 간 갈등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이고! (한숨을 내쉬며) 세대 갈등의 안쪽에 개인주의, 물질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세대들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부모로부터 몸을 받았으니 아들딸 낳아주는 게 효도라는 동양의 전통 사고가 없어진 것이지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노력하고 그 대가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여겨야 하는데, 모두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더 잘 살기를 바랍니다. 기성세대인 부모들이 내 아들딸은 남보다 더 우뚝 서야 한다고 욕심을 부린 탓입니다.”
―출산 장려를 위해 국가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자유 의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민주국가입니다. 나라가 너무 깊이 개입하면 통제 국가가 되기 때문에 지원 정책에 기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 의식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으니 그들이 수긍할 때까지 국가가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정치 불신도 큰 문제입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아주 불필요한 정치 유랑민이 많은 탓입니다. 일본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기술자가 100만 명인데, 우리나라는 정치 건달이 1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출세 지향 사회라서 그렇습니다. 관료를 우대한 조선조 500년의 DNA가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입니다. 국회의원 대접이 회사원의 그것과 같으면 누가 구태여 의원 하려고 하겠습니까. 선진국처럼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합니다.”
―총무원장 재임 때 윤석열 대통령을 수차례 만났는데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국정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나요.
“네, 여러 차례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7대 종단 지도자들과 함께 초청을 받아 대통령 집무실에 갔을 때가 떠오릅니다. 기념 촬영을 할 때 대통령께서 종교계 수장들이 앞에 앉아야 한다며 당신은 한사코 뒤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겸양지덕이 있는 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국정 수행하는 걸 보면, 원칙을 갖고 소신 있게 추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검찰이라는 조직에서 성장한 분이니 소통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겠으나, 지금보다 소통과 대화를 더 넓혔으면 합니다. 이번에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가서 광주 시민들을 진심으로 위로한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매사에 여과 장치를 갖고 국민을 설득하면 오해가 덜 될 것입니다. 중요한 정책들이 충분한 논의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당은 숫자가 많다고 입법독주를 하지 말고 국민을 위해 여야 소통에 더 힘써줬으면 합니다.”
―불교계 내분이 극심할 때 원장 소임을 맡아 승가를 화합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하하, 그렇게들 말씀해주시니 고맙지요. 출가해서 수행하는 궁극 목표는 자유와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사심(私心)이 전혀 없을 수 없지만, 그걸 내세우면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공심(公心)으로 역지사지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시기에 우리 종단에서 집단 감염 사례가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대면 신행 금지에 협조해 준 종도들에게 고맙습니다. ‘백만원력 결집불사’에 많은 불자가 참여해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 덕분에 인도 부다가야에 한국 사찰을 짓고, 국내에선 세종 광제사, 계룡대 호국홍제사 등을 건립할 수 있었지요.”
―재임 시 아쉬웠던 일은.
“힘든 일이 늘 있었는데, 전국승려대회 때가 가장 마음의 갈등이 컸습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사찰을 통행세 뜯는 봉이 김선달이라고 했을 때 말이군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니 빨리 사과를 했으면 됐는데, 그러지 않으니 전국승려대회까지 가게 돼 저로선 마음의 부담이 심했습니다. 대회에서 분신하겠다는 승려가 있었으니 ….”
―분신요? 그렇게까지 분노했군요.
“단지(斷指)하겠다는 승려도 열 몇 명이나 있었습니다. 다행히 설득해서 큰 불상사 없이 여법하게 대회가 끝났고, 결과적으로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면서 관람료 문제가 해결됐지요. 그건 민족문화 보존이라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단순히 사찰 지원 문제가 아니지요. 하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사부대중에게 참으로 죄송합니다. 또 당시 승려대회가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조금이라도 그랬다면 미안합니다.”
―경주 남산의 열암곡 마애불을 바로 세우는 사업 추진위에 참여하셨더군요.
“네, 밖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그 사업은 제가 재임 때 시작한 것이니까요. 종단의 새 집행부가 큰 과제로 삼아주신 것이 백 번 고맙습니다. 수백 년 전 천재지변에 의해 넘어졌으나 얼굴을 다치지 않고 기적으로 나투신 부처님입니다. 불자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바로 서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원행 스님이 사진 기자에게 “저를 촬영하느라 애썼으니 제가 한 번 찍어드려야 하겠다”며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 원행 스님은…
18년간 ‘나눔의 집’ 상임이사… 위안부 할머니 열다섯분 장례 모시기도
“제가 태어난 소동리의 옆 동네가 대동리인데, 거기서 탄허(呑虛·1913∼1983) 스님이 나셨다고 합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원행 스님은 불가와 필연이었다고 되돌아봤다. 초등학교 때 전교어린이회장을 했을 정도로 영민했던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결국 만 22세 때인 1973년, 월주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충북 보은 법주사에서 출가했다. “5형제 중 맏아들인 제가 승려가 됐으니, 어머니께 늘 죄송했지요.”
수행과 함께 학문에 열정이 깊었던 그는 해인사승가대,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수학했다. 한양대에서 ‘조선 초기 관료들의 성리학적 정치 이념과 함허 선사의 현정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향 인근의 대찰인 금산사 주지와 전국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중앙종회 사무처장과 중앙승가대 총장을 거쳐서 제36대 총무원장 직을 수행했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대표의장을 맡아 종교 간 화합에 힘썼다.
‘깨달음의 사회화’를 주창한 은사 스님의 뜻을 좇아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섰다. 지구촌공생회 상임이사, 국제평화인권센터 대표,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 이사장 등이 그것이다.
그는 월주 스님이 만든 경기 광주 ‘나눔의 집’ 상임 이사를 18년간 맡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열댓 분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분들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이 밤샘을 함께해 준 적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만 딸을 데려와 하루 머물고 간 적이 있지요.”
그는 월주 스님이 정부 지원 하나 없던 1992년에 나눔의 집을 마련한 후 29년 동안 헌신했는데, 말년에 기금 운용 의혹으로 명예가 훼손된 것에 대해 지금도 가슴 아프다고 했다. “경기도와 광주시의 내부 감사를 통해 단순 행정 처리 문제로 결론 났는데, 이후 경기지사가 특별 감사를 지시하는 일이 왜 벌어졌는지…. 제가 은사 스님을 곁에서 늘 봤으니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청렴결백한 분입니다. 절대로 부정은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여권이 ‘윤미향 사태’의 파장을 줄이기 위해 나눔의 집을 흠집 낸 것이라고 보지만,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갔다.
“저희가 지금 새겨야 할 것은 은사 스님께서 정의경제 실천, 남북 서로 돕기, 환경 문제 인식 등에 선구적으로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강원용 목사, 김수환 추기경 등과 함께 종교 간 화합에 나서신 것도 큰 귀감이지요. 그 뜻을 받들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에 힘쓰는 것이 은사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제공 : 문화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