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선원사지 발굴조사 2002년 중단된 이후 학계 의견 분분
“팔만대장경은 세계인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치가 큰 문화유산입니다. 중단된 발굴조사를 서둘러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고려 때 만들어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은 지금도 판각 장소를 놓고 학계 의견이 분분하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가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1230년대부터 10여년에 걸쳐 대장경이 만들어졌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됐으나 판각 장소를 놓고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전국 여러 장소에서 판각됐다는 설, 강화도와 남해로 나뉘어 판각됐다는 설, 남해에서만 판각됐다는 설 등이 존재한다.
판각 장소를 놓고 학계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는 이와 관련한 충분한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대장경 조성 사업을 주도했던 ‘대장도감’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강화 선원사 터 등지에 대한 발굴 조사마저도 중단되면서 대장경 판각 장소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선원사 주지인 성원 스님은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충분히 있는 팔만대장경 조판 장소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관심을 안 가진다”며 안타까워했다.
성원 스님은 강화 전등사에 있다가 1993년 절터만 남아 있던 선원사를 사실상 창건했고, 이후 꾸준히 선원사 복원·발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선원사는 1245년(고려 고종 32년)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다. 집채는 500간이며 수백명 중이 거주했던 거대 사찰이었다.
선원사는 대장경 조판이 이뤄졌던 장소로 알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실제 조판 장소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학계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8년(태조 7년)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擧動·나들이) 하였다. 대장경의 목판을 강화의 선원사로부터 운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화 선원사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됐다는 사실만은 확실하지만, 이를 판각한 장소라는 기록은 없다.
선원사에 대한 발굴 조사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면서 사적지로 지정된 현 선원사지가 실제 선원사가 있었던 터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강화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발견했고, 이듬해인 1977년 사적 259호로 지정됐다.
이후 1995년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계기로 인천시가 선원사 사적지 복원 예산을 편성했고, 1996년 동국대 박물관 주도로 발굴조사가 시작됐으나 2002년부터 중단된 상태다.
동국대 박물관은 발굴 조사를 통해 현 사적지가 실제 선원사지였을 것을 방증하는 자료들을 찾았으나 이를 입증하는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성원 스님은 자체적으로 조사를 해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됐으며 현 선원사지가 실제 선원사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선 대장경을 만들 때 바닷물에 나무를 담가서 응달과 양달에 번갈아 말렸다는 기록을 토대로 과거 바닷가 옆에 있었던 현 선원사지가 대장경 판각 장소로 최적지였다는 게 그의 견해다.
이 일대의 지명인 ‘건지고개’도 대장경 조판 당시 나무를 번갈아 말린 데서 비롯한다고 봤다.
아울러 이 일대 도감마을이라는 지명은 대장경 판각을 주도한 ‘대장도감’이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한다.
성원 스님은 “동문선이라는 책에 선원사에 살던 스님이 쓴 시가 나오는데 현 선원사지의 모습과 일치한다”며 “대장경을 보관만 했다는 학자가 있는데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면 선원사 주변에서 대장경을 만든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선원사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와 팔만대장경과 관련한 연구 등을 통해 대장경 조판 장소에 대한 여러 의문이 해소되기를 희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