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로 분별심 버리고 보리심 증득
‘보리(菩提)’는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지만
우리 불자들은 ‘보리’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
‘보리’를 문헌적으로 보면, 불교에서 수행결과 얻어지는 깨달음
또는 그 지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도(修道)의 한 과정이라고 되어 있다.
불교에서 ‘보리’를 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그 또한 자신의 근기(根基)에 알맞은 길을 찾아 행하면 된다.
마치 가는 길은 다르지만 종착역이 매 한가지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산사순례’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 ‘보리’를 증득(證得)하기 위함에 있다. 왜냐하면 9년간에 걸친
‘108산사순례’는 결코 쉽지 않는 하나의 수행 과정이며
이를 통해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08염주’를 모두 꿰는 것은 ‘보리’를 증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염주 한 알 한 알 속에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정성이 담겨져 있고, 마음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공경심이 모두 들어 있다.
생각해 보면 이 보다 더한 공양은 없을 것이다.
다들 지혜와 깨달음인 ‘보리’를 얻는 것을 두고
아주 힘들고 거창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어렵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업을 유지하여 가족을 보살피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이며, 탐욕과 번뇌를 지우고
자신의 삶에 충실 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말하자면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운 것’이 지혜이며 깨달음이지만
보통사람들은 이를 알면서도 제대로 ‘보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나는 지난 4년간 ‘108산사순례’를 하면서 우리회원들에게서
수많은 ‘보리심’을 발견했다. 장병들에게 초코파이 상자를 전하거나,
부처님께 공양미를 올리고 또 기와 한 장을 보시하거나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사순례에 오는 것이나
가족들이 삼삼오오 순례에 나서는 모습이 바로 보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리’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마음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보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원래 인간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고 평평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게 된다.
스스로 마음이 파도를 일게 하는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 어떤 작용을 받아 파도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마음은 하나의 ‘허공’에 지나지 않지만 어떤 유혹을 받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번뇌의 불길이나 탐욕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결코 ‘보리’를 구할 수 없게 된다.
진정한 보리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탐욕과 번뇌를 끊고
그대로 놓아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두고 고금의 선사들은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했다.
‘108산사순례’를 다니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비우고, 놓아버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산사에 와서 부처님을 대하고 끊임없이 참회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겸허와 겸손이 깃들게 되고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어 너그럽게 타인을 용서하게 되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법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을 겪다보면 어느새 도인(道人)이 된 자신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이것이 세상을 즐겁고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다
불자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보리’를 외친다.
우리 ‘산사순례’ 회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산사순례’에 왔다 며칠만 지나면 보리심이 온대간데 없다.
이는 수행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근기(根基)가 모자란 탓이며
분별심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심지어 순례에 와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다투는 마음이나 조그만 불편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을 놓아버리고 비워버리는 것은 ‘좋다, 나쁘다’라는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인데 곧 분별심이
갈등과 번뇌와 탐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산사순례’는 곧 그러한 분별심을 버리는 하나의 과정이며
‘보리’를 구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선묵 혜자 스님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도선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