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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3 룸비니




* 3강 : 룸비니에서


 
영국의 공리주의(功利主義) 철학자 밀(J. S. Mill)은 “소크라테스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류가 아무리 상기해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여실하게 알고 그 실현의 길을 우리에게 전해 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출생 연대에 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다. 지금은 ‘세계불교도우의회(世界佛敎徒友誼會)’에서 그 연대를 통일하여 세계 공통의 불기(佛紀)를 사용하고 있다.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통일하여, 서력기원의 해는 불기 544년이 된다. 그런데 불기는 부처님이 입적한 해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탄생 연대는 부처님의 생존 기간인 80을 더하면 기원전 624년이 된다.
 
부처님은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근처에 있었던 카필라성의 왕인 숫도다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과 부인이 오랫동안 자식을 기다리다 단념하고 있을 때, 마야 부인은 몸속에 흰 코끼리가 들어가는 꿈을 꾸고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산달이 되어 당시의 풍습에 따라 마야 부인은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룸비니 동산을 지나다 산기를 느끼게 되었다.

일행은 나무 그늘 아래 휘장을 치고, 부인은 무우수 가지를 잡은 채 오른쪽 옆구리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오른쪽 옆구리로 낳았다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의 신분이 크샤트리아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베다에 의하면 브라흐만은 머리에서, 왕족은 옆구리에서, 평민은 허벅지에서, 노예는 발바닥에서 각각 태어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는 지금 네팔의 타라이 지방에 속해 있으며 인도 국경으로부터 30~40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UN이 이곳을 성역화하고 있는데, 부근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세운 사찰도 있다. 룸비니에는 마야 부인을 기리는 사찰이 있고, 마야 부인이 목욕을 했다는 연못도 있다. 후에 아쇼카왕은 이곳을 방문하고 돌을 깎아 높은 석주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명문을 새겼다.

“즉위 20년에 친히 이곳을 방문하고 공양을 드린다. 여기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석주는 19세기 말경 발견되어 이곳이 부처님 탄생지임을 확인해 주었다.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Gotama)였고, 어릴 때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다. 부처님을 석가모니, 혹은 석존이라 부르는데, 이 말에는 석가(釋迦)족의 성인, 석가족의 존자(尊者)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인도를 비롯한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서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을 ‘위샥’이라 해서 성도·열반과 함께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 오신날’을 음력 4월 초파일에 봉축하고 있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온 세상이 괴로움 속에 있으니 내 이를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
 
이것은 ‘탄생게’로 불리는 유명한 선언으로 부처님, 나아가 불교의 기본을 잘 나타내는 가르침으로 이해되고 있다. 금방 태어난 아이가 사방으로 걸으면서 이런 사자후를 외쳤다는 사실적 입장보다는 거기에 담긴 뜻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탄생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먼저 부처님은 참 생명의 소식을 전하고 일깨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소식이 바로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는 선언이다.

이것은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나 혼자만 제일이다’는 말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 선언이며, 생명 선언인 것이다.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할 것은 ‘아(我)’라는 말이다. 여기서 ‘아’는 개체적인 나가 아니라, 나와 우주가 하나인 ‘큰 나’, ‘참 나’를 가리킨다. 그런 ‘하나’인 바탕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나를 북돋우고 일깨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탄생게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 인간선언’이자 ‘새 생명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선언이나 인본주의 하면 르네상스를 먼저 떠올리지만, 서양의 르네상스는 반쪽 인도주의요, 반쪽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서구의 인본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은 개별적인 나를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남이 나뉘어 대립하는 나요, 나와 자연이 나뉘어 대립하는 그런 개별적인 나일뿐이다.

서양의 인본주의는 중세의 신본주의에 대한 반동운동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하늘같은 나’, 참 인간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참 인간성을 간과한 ‘나’는 불교적으로 보면, 표층의 감각하고 지각하는 차원의 ‘나’에 불과하다. 그 표면의 ‘나’만을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단정한 것은 천박한 인간이해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본래 감각, 지각하는 ‘나’보다 더 깊은 차원의 ‘나’, 여여(如如)한 불성(佛性)인 ‘여래의 씨알’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지각하는 나는 나와 남, 나와 대상을 둘로 보는 차원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더 깊은 곳의 나, 여여한 씨알인 불성으로서의 참 나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천박한 인간이해는 결국 현대인에게 인간상실, 자기상실이라는 병을 가져왔다. 이러한 자기상실의 병은 천박한 인간이해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인본주의가 감각·지각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왔기에 현대문명 역시 그런 쪽으로 치달아 왔다. 인간의 감각·지각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근대의 인간주의는 현대과학과 물질문명을 발달시켰다. 하지만 눈·귀·코·혀·입 등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깊은 곳의 본래적인 참 나는 게을리 되고 잊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가 자기상실이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 환경과 생태계가 파괴되는 세기말적 징후 역시 이런 천박한 인간이해의 산물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과 자연을 둘로 보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함부로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천박한 인본주의를 최고의 사상으로 여기게 된 우리의 현실을 보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것은 서구 중심, 서구 일변도의 식민교육의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에 의하면 인간의 참 생명은 본래 나와 이웃, 나와 다른 생명,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닌 하나인 생명이다.

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에서 드러나는 이런 ‘하나’인 세계관, 하나인 바탕은 오늘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생명, 인간과 자연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인간과 인간의 단절뿐만 아니라, 인간과 다른 생명 및 자연의 관계마저 파괴 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는 생태계의 파괴, 환경파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과 다른 생명, 인간과 자연을 둘로 보고 그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함부로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을 때 이런 문제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저 룸비니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인간 선언을 다시 경청하고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세계는 지금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생명,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과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와 이웃, 나와 다른 생명, 나와 자연이 하나인 세계관을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이다. 룸비니의 아름다운 동산에서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떼어 놓으며 하늘과 땅을 가리키던 어린 싯다르타의 몸짓은, 나와 우주가 하나 되는 우주적인 춤, 하나인 생명의 춤이다.
 
또 부처님의 탄생게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소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는 고통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중생들을 평안케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괴로움 속에 있으니 내 이를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三界皆苦 吾當安之]’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친 후 45년 동안의 삶은 중생의 아픔을 치료해 주는 실천으로 일관되었다. 그런 실천은 동체자비의 삶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하나인 생명자리, 하나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몸짓이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부처님의 탄생게에는 불교의 본질인 깨침과 자비의 가르침이 모두 배어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는 선언은 다름 아닌 일체의 모든 생명이 하나인 바탕이라는 깨침의 소식이며, ‘온 세상이 괴로움 속에 있으니 내 이를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는 선언은 그 깨침을 바탕으로 참다운 자비행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침과 자비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인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바로 동체자비(同體慈悲)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깨침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모든 생명과 하나인 바탕이 될 때 참다운 자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인 생명의 원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말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불자들은 본래의 나, 하나인 생명에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동체자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이 바로 참 나눔의 삶이다. 이런 참 나눔의 삶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환경을 보존하며 평화를 증진하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는다. 이 날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의 회상이나 기념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부처님께서 여여(如如)히 오시는 날로 삼아야 한다. 이 날은 인간선언, 생명선언을 확인하고 실현하려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알고 잘 받드는 실천을 해야 한다. 먼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진실로 가까워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의외로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과 두터운 벽을 쌓고 있는데, 그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 만나는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여여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아내를 부처님으로 모실 때, 남편을 부처님으로 받들 때, 노동자를 부처님으로 모실 때, 학생을 부처님으로 모실 때, 스승을 부처님으로 모실 때 부처님께서는 우리 앞에 오실 것이다. 그들 모두가 참 생명이요, 여여한 부처의 씨알들이기 때문이다.

참 불공(佛供)은 이들 살아 있는 부처님을 잘 모시는 것, 우리의 산하를 맑고 깨끗하게 가꾸는 것, 버림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함께 나누고 잘 받들고 모시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불공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우리들의 가정, 이웃, 일터, 학교, 사회의 모든 자리에서 부처님이 오시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참 인간, 참 생명의 꽃이 피어나 이 땅을 정토로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다.


2019.06.12 14: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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