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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대장경뉴스
매일신문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옮긴 후 지은 왕궁터인 고려궁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최고 문화재인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 오늘날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또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이지만, 판각 장소나 이운 경로 등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이 때문에 매일신문은 팔만대장경에 얽힌 것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했다. 이운 순례길 시리즈를 기획한 이유다.

팔만대장경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경로로 경남 합천군 해인사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해 독자들의 의문을 풀어볼 예정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팩션(faction) 기법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몽고군 침입에 맞선 15년간의 대불사(大佛事)

하늘은 잿빛으로 변해 금세 함박눈이라도 쏟아질 태세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왕 고종은 강화도 고려궁지 뜰을 거닐고 있다. 어느새 진눈깨비가 옷깃을 스친다. 고려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였다.

몽고 군사들의 말발굽 아래 고려 군사들은 힘 한번 못 써보고 나가떨어졌다. 백성들의 집은 불타고, 남자들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끌려가 노예가 됐다. 몽고군의 횡포가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백성들은 믿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참담한 현세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죽어서나마 극락왕생하는 세계에 가기 위해 유일한 종교였던 부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쟁 속에서 고종은 나라를 구할 한 줄기 희망은 대구 부인사에 있는 초조대장경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은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천도할 때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을 옮겨오지 못한 것을 끝내 후회했다.

우리나라에서 대장경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이 발원됐다. 이 대장경은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1087년(선종 4년)이 되어서야 완성됐다.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로 옮겨 봉안하였으나, 1232년(고종 19년) 몽고군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은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종은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왕조가 강화로 천도한 1232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이미 불타 없어졌다. 초조대장경이 소실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부인사에 초조대장경이 잘 있으며, 오랑캐들이 물러가지 않을 경우 대장경을 옮겨 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왕은 하늘을 쳐다봤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은 얼굴을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

왕의 진노에 안절부절못한 사람은 진양후인 '최우'였다. 무신정권의 최고 우두머리인 최우는 오랑캐를 막아내고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의무와 대장경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초조대장경은 단순한 경판이 아닌 고려인들의 영혼이자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도와주는 정신적 지주이며, 곧 부처님이었기 때문이다.

최우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대장경을 다시 만들기로 결심했다. 백성들의 민심을 한곳에 모으고, 집권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이벤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초조대장경이 불탄 지 4년 만인 1236년(고종 24년) 팔만대장경 판각사업의 대불사가 시작됐다.

최우는 가장 먼저 강화도에 대장경 판각을 총지휘할 '대장도감'을 설치했다. 이와 함께 경남 남해에도 '분사대장도감'을 세워 경판을 판각하게 했다.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한 것은 사위 '정안'이 부호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 최우는 팔만대장경을 도맡을 총 책임자로 충남 논산 개태사 주지였던 '수기대사'를 모셔왔다.

그리고 최우는 1245년(고종 32년) 강화도에서 선원사를 창건했다. 선원사는 대몽고 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대장경판을 봉안 관리할 고려 제2의 선찰이었다.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 2대 사찰이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고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우는 팔만대장경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249년 숨졌다. 2년 뒤인 1251년 9월 25일 팔만대장경이 드디어 완성됐다. 1236년 시작해서 꼭 15년 만이다. 팔만대장경은 최우의 아들인 최항이 결실을 보게 됐다.

◆민족의 혼이 담긴 팔만대장경

대장도감에는 새벽부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새벽 예불을 올리려던 고려인들은 멀리서 통나무를 싣고 오는 수레바퀴 소리에 밖으로 뛰어나가 통나무를 내려놓는다. 나라 곳곳에서 나무를 베고 톱질을 하며 대패로 다듬는 목공들의 요란한 망치 소리는 새벽을 가른다.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에 참여한 고려인들의 출신 성분은 다양했다. 왕족을 비롯한 고위 관료 및 유교 지식인들로부터 하급 관료와 향리 및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모든 계층이 힘을 보탰다. 불교계에서는 종단과 종파를 초월하고 고덕대승과 일반 승려들이 역할을 분담했다.

경판을 만드는 통나무는 주로 산벚`돌배나무가 쓰였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40∼50년생 나무 중 지름 40㎝ 이상이고, 옹이가 없는 나무가 경판재로 선택됐다. 나무를 벌채한 후 얼마간(1, 2년)은 현장에 통나무 상태로 눕혀 뒀을 가능성이 크다. 꼿꼿하게 서 있을 때의 생장응력(生長應力)을 없애기 위해서다. 응력을 제거해야 건조할 때의 갈라짐과 비틀어짐을 막을 수 있다.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든 다음에는 소금물에 삶아 말렸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고, 글자를 조각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경판을 새긴 후 벌레 알이 애벌레가 되어 경판을 파먹는 일이 없도록 소금물에 삶았다.

건조하기, 판자 다듬기 과정을 거친 후에야 경판에 경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밀하게 교정해 둔 판하본(板下本)을 경판 위에 고루 풀칠하고 붙였다. 경판을 새기기 직전에 식물성 기름을 얇게 바르고, 경판을 새겼다. 장인 한 사람이 하루에 30∼50자를 새기는 말 그대로 '혼을 불어넣는' 인고의 작업이었다. 경판 한 장에 새겨진 글자는 한 줄에 14자씩, 모두 23줄의 경전이 앞뒤로 새겨져 약 640자다.

팔만대장경이 760년간 오롯이 보존되고 있는 것은 이런 과학적 제작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을 품은 선원사(禪源寺)

11월 가을 어느 날 오후에 찾아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있는 선원사지는 황량하기만 했다. 누렇게 변한 잔디만 관람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고 보관했던 곳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역사의 흔적이 없었다. 그저 돌로 쌓은 석축만이 옛 절터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최우는 삼별초 군사들을 이끌고 팔만대장경이 한창 제작 중인 대장도감에 들렀다. 대장경을 총괄하고 있는 수기대사를 찾았다. 그렇지만 수기대사는 그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 퍼런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우를 본체도 하지 않았다. 최우는 수기대사의 태도에 속앓이를 했지만, 부처님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대장경 판각을 방해할 수 없었다.

대장도감에 다녀온 최우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할 사찰을 지을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신하들은 산은 야트막하고 앞으로는 삼밭이 펼쳐졌으며, 푸른 바닷물결이 출렁거리는 곳. 바다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들과 산은 서로 껴안은 듯 이어져 있는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절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했다. 터를 본 최우는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할 선원사를 창건했다.

선원사를 표현하면서 달전 스님이 읊었다는 시 선원사 청원루(淸遠樓)의 일부다.

구태여 높은 산 안 올라도 마음이 활짝

넓은 들이 삼밭이오 바다가 내(川)로세

아침결 지나는 배는 정경이 정답고

저녁 무렵 초가집에는 연기 나는 곳 어디인가

들이 산을 안았는가 산이 들을 안았는가

선원사는 고려 문화를 꽃피운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며, 세계 찬란한 문화유산이자 한국 불교 최고의 법보(法寶)인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성지이다. 또 여러 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僧寶)의 산실이었으며, 나아가 고려시대의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대가람이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가피력에 힘입어 국가를 지키겠다는 간절한 발원 아래 1236년부터 시작해 1251년 9월 완성됐다. 팔만대장경 목판은 선원사에서 147년간 보관돼 있다가 1398년(조선 태조 7년) 서울 지천사로 옮겨졌다. 1456년(세조 2년)에 해인사로 옮겨간 후 기록이 없다. 이 당시 선원사는 훼철돼 흔적도 못 찾다가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됐다.

선원사 주지 성원 스님은 "고려 문화를 꽃피운 가장 대표적인 사찰인 선원사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며,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원천이다"면서 "1995년부터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주 고령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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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07:55:14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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