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내가 끔찍이도 보살피는 이 몸은 地水火風 4대로 이루어졌으며,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또 ‘나’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나는 五蘊, 卽, 色受想行識으로 일시적 인연으로 모인 덩어리에 불과하다. 나를 비롯하여 실재하는 존재들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존재들이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히거나 목구멍에 생선가시가 걸리면 상당히 성가시고 한동안 나를 괴롭힌다. 조금만 더워도, 조금만 추워도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렵다. 불교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다 허망하고 일시적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부질없는 이 몸과 생각으로 늘 고뇌하고 일희일비 하며 살고 있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세상사의 사건들은 영원한 삶을 보장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 내 행동은 모두 정당하고 상대방, 상대편, 저 편의 생각과 행동은 옹졸하고 치졸하며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고 부르짖는다. 몇 년 전에 자신들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고치라고 했던 행위들이 지금은 정당하다며 버젓하게 행하고 있다. 그럼, 과연 나는 차별하고 분별없이 잘 살고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남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나와 너, 우리와 너희들, 나와 남이 어울려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울리기도 하지만, 늘 부딪히며 견제하며 살고 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견제하며 사는 것 자체가 더불어 사는 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無我를 無常을 주장하며 살지만 현실에서는 어김없이 내 몸, 내 생각을 우선 적용한다. 무아나 무상은 그 순간에는 어디에도 없다. 아침에 차를 운전하는 단 몇 초간에도 얼쩡거리는 상대방의 차가 못 마땅하기만 하다. 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좋은 이야기들은 실제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이념적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언제나 내편, 너 편이 있으며, 내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너 보다는 ‘나’라는 이 몸을 잘 보살피고 있다. ‘나’가 누구인가? 마음인가, 자아인가, 몸뚱아리인가?
이 조차도 분명히 정의되고 있지 않지만, 어째든 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육체와 늘 생각하고 있는 이 마음이 그냥 ‘나’라고 생각한다. 오온의 덩어리인 ‘나’가 어떤 인연으로 이 세상에 와서 또 다른 세상으로 갈런지 모르지만, 세상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으로서의 좋은 품성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인류가 면면히 이루어 놓은 가치적인 기준, 인류 보편적인 패러다임 속에서 잘 살아야겠다. 오늘도 살인을 하고 폭행을 하고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 보니 개개인을 단속하기는 쉽지 않고 각각의 사생활보호 등과 충돌되어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내가 있으니 남도 있고, 또 남이 있으니 나도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러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생이나 후생에 나와 너는 같은 존재였거나,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2019년4월18일 밤, 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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