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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ha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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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은 나를 얽어매는 굴레다
육신의 욕구와 욕망은 정신을 얽어매는 굴레다.
이와같이 감정과 생각에 매달림 그리고
자기 중심적 사고도 우리를 얽어매는 굴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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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말나식(第七末那識)

 

 

7 말나식(第七末那識) 





1. 말라식(末那識)의 성립 


인도에서 유식(唯識) 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觀察)하여 학문적(學問的)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은 말라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의 발견이다.  

 

말나식은 원시불교(原始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설명하고 있는 육식(六識) 사상(思想)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육식(六識) 가운데 의식(意識)이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데, 평상시(平常時) 의식생활(意識生活)은 충분히 설명(說明)할 수 있으나 상식(常識)을 초월한 정신계(精神界)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 내용(內容)을 보면 평상시(平常時) 의식(意識)에 나타나는 선(善)의 생각과 악(惡)의 생각 그리고 선(禪)의 행동(行動)과 악(惡)의 행동(行動) 가운데 특히 선(禪)의 행동(行動)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양심적(良心的)으로 사는 사람과 또 종교(宗敎)에 귀의하여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행(善行)을 낙으로 알고 생활(生活)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뜻밖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갖게 하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평소의 생활태도가 매우 착하고 법(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흉악한 범행(梵行)을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가끔 화제 거리로 등장하는 예가 흔히 있다.


이와 같이 평소의 의식생활(意識生活)에 나타나지 않다가 나쁜 마음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다시 의식(意識)을 통(通)하여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의문(疑問)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마음을 관찰(觀察)하며 탐구하는 유식학도(唯識學徒)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학도(唯識學徒)들은 선정(禪定)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修行)을 통하여 마음을 정화(淨化)해 갈 때도, 번뇌(煩惱)는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자(唯識學者)들은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境地)에 도달했다고 해도 충분할 만큼 수행(修行)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煩惱)가 아직도 남아있어 지혜(智慧)의 활동(活動)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요가(yoga)를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을 한역(漢譯)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하는데 이들이 닦는 요가, 즉 명상(瞑想)은 불교적(佛敎的) 선정(禪定)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선정(禪定)을 닦는 유가행파(瑜伽行派)들이 내심(內心)을 관찰(觀察)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였다. 부사의(不思議)한 정신계(精神界)를 깊숙이 관찰(觀察)하며 선정(禪定)을 닦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 선정(禪定)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意識)에서 나타나는 번뇌(煩惱)는 이미 정화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根源的)인 번뇌(煩惱)를 지니고 있어 그 경지를 해탈(解脫)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6 의식(意識)이 평소의 의식생활(意識生活)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心體)에서 나타나는 번뇌(煩惱)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解脫)의 경지(境地)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意識)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를 말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思想)을 체계적(體系的)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심의식(心意識) 사상(思想)을 대승적(大乘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방법(解釋方法)은 종래(從來)에 내려오던 심의식사상(心意識思想)을 소승불교(小乘佛敎)와는 달리 확대 해석하여 심(心)을 아라야식으로 해석(解釋)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解釋)하였으며, 식(識)을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 육식(六識)으로 해석(解釋)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가행파(瑜伽行派)들은 곧 유식학도로서 종래의 심의식(心意識) 사상(思想)을 혁신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어 마나스(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六識) 이외의 심체(心體)로 간주하고 아라야식과 더불어 별체(別體)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범부(凡夫)들의 심체(心體)는 팔식(八識)으로 분류되어 작용(作用)하고 있다"고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思想)이 후세(後世)에 중국(中國)에서 번역될 때 한문으로 제7식(第七識)을 의(意), 그리고 육식(六識) 가운데 제6식(第六識)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진제삼장 등 구역가(舊譯家)에 속하는 유식학자(唯識學者)들이 번역한 것이고, 그 뒤에 현장법사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많은 범본(梵本)을 번역할 때,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 번역하였고,

제6식은 의식(意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구유식가(舊唯識家)들이 번역한 의(意)와 의식(意識)은 의(意)자가 두 번 반복되어 논전(論典) 등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후학(後學)들이 혼동하기 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장법사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제7識인 의(意)를 원어(原語)로 두기로 하고 마나스(manas)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中國)과 한국(韓國)의 유식학계(唯識學界)에서는 그 후 말나식과 의식(意識)으로 그 성질(性質)을 분명(分明)히 하여 읽게 되었고 설명(說明)해 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意識)과는 또 다른 심체(心體)로서

특히 근본적(根本的)인 번뇌(煩惱)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心識)으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는 의식(意識)과 말나식에 나타나는 번뇌(煩惱)의 성질(性質)과 심체(心體)의 성질(性質)을 분명(分明)히 하기 위해서 선정(禪定)의 이름도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다.


그것은 선정(禪定)을 수행(修行)할 때 의식(意識)의 번뇌(煩惱)만을 정화(淨化)하는 선정(禪定)의 이름을 무상정(無想定)이라 하였고, 또 의식(意識)의 번뇌(煩惱)는 정화(淨化)되었지만 때때로 의식(意識)에 영향을 주면서 아직도 번뇌(煩惱)의 작용(作用)을 야기하며 또한 번뇌(煩惱) 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지니고 있는 말나식까지 정화하여 완전히 해탈(解脫)케 하는 선정(禪定)의 이름을 멸진정(滅盡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선정(禪定)의 이름을 정하여 불교(佛敎) 이외의 종교인(宗敎人)과 외도(外道)들은 무상정을 닦아 의식까지의 번뇌만을 정화하지만 불교(聖敎)에서는 더욱 깊이 있는 말나식의 번뇌(煩惱)까지 정화하고, 완전히 해탈(解脫)의 경지(境地)에 도달케 하는 멸진정(滅盡定)을 수행(修行)한다고 하여 외도(外道)의 선정사상(禪定思想)과 구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이 우리 인간(人間)의 심성(心性) 내에 있다고 보고 그 체성(體性)을 독특하게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唯識學)의 입장이다. 

 

말나식의 체성론(體性論)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말나식(末那識)과 사번뇌(四煩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나식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번뇌(煩惱)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번뇌(煩惱)의 근원(根源)을 말나식에 두고 있으며, 말나식은 항상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는 마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번뇌(四煩惱)는 영원한 진리(眞理)이며, 중도(中道)의 경지(境地)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해서 문득 망각(妄覺)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한 데서 나타나는 번뇌(煩惱)의 작용(作用)을 말한다.


번뇌(煩惱)의 종류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 가지를 말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치(我痴)

 

 

아치(我癡)는 나에 대한 무지(無知)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가 보통 집착심(執着心)으로 나를 내세우는 나(我)가 아니라 그 집착심(執着心)이 있기 전(前)의 나(我)를 뜻한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라고도 하며, 진아(眞我)라고도 한다. 이러한 나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진여성(眞如性) 또는 불성(佛性) 그리고 법성(法性)과도 통하는 나(我)이다.


이와 같은 나에 대하여 전도(顚倒)된 마음으로 착각(着角)하고 집착(執着)하는 작용(作用)을 치(痴)라 하며, 치(癡)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無明)은 무지(無知)로서 모든 진리(眞理)를 비진리적(非眞理的)으로 전도(顚倒)하는 마음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도(顚倒)란, 마음이 뒤집어졌다는 말이며, 항상(恒常) 진리(眞理)를 정반대로 착각하는 심리작용(心理作用)으로서 이러한 작용(作用)에서 나타나는 마음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심(顚倒心)을 아치(我痴)라 할 수 있는데, 아치(我癡)의 마음이 야기하는 그 순간을 해설하여 아집(我執) 또는 법집(法執)이라 한다.  


아집(我執)은 아치와 통하는 말로서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관계(因緣關係)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또 평등(平等)한 무아(無我)의 진리(眞理)에 대하여 망각하고 집착(執着)함을 뜻한다.


또 법집(法執)은 진리(眞理)로운 법칙(法則)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를 집착(執着)함을 뜻한다. 즉 마음속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법집(法執)이고 동시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은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없는 경지(境地)가 곧 무아(無我)인 것이며 이 무아(無我)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을 부단히 수행(修行)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修行)하는 도상에서 제일 먼저 정화되는 것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五識)이고, 그 다음에 정화되는 마음은 의식(意識), 육식이다.


그리고 최후에 정화되는 마음은 말나식(末那識), 칠식으로서 이 말나식이 정화 될 때, 위에서 말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없어지고 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치(我痴)의 번뇌(煩惱)도 없어진다.

 

이러한 경지(境地)를 우리는 성불(成佛)의 경지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또한 오도(悟道)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根本)이 되는 번뇌심(煩惱心)을 말나식이라 하고 말나식에 번뇌(煩惱)가 있는 한 범부(凡夫)의 것이며, 반대로 만약 말나식의 번뇌(煩惱)가 다 정화되었다면 성불(成佛)의 경지(境地)로서 다시는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곧 무애자재(無愛自在)한 경지가 되며 동시에 무한(無限)한 진여(眞如)의 경지(境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佛敎)의 번뇌사상(煩惱思想)과 수행사상(修行思想)은 밀접한 관계(關係)가 있는 것이며, 이를 이론적(理論的)으로 분명(分明)히 하고자 한다면 말나식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종래의 학자(學者)들도 또한 그렇게 하여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의 위치는 오도(悟道)의 경지(境地)를 설명(說明)할 때에 매우 필요할 뿐 아니라 번뇌(煩惱)와 수행(修行)을 설명(說明)할 때도 중요(重要)한 이론적(理論的) 근거로 삼아왔다.



2) 아견(我見)

 

 

아견(我見)은 위에서 살펴본 아치라는 번뇌(煩惱)가 야기한 후에 곧 나타나는 망견(妄見)을 뜻한다.


무아(無我)의 진리(眞理)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에 대하여 집착(執着)하는 사견(邪見)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번뇌심(煩惱心)이 매우 고정되어 나라는 집념(執念)이 강화된 경지를 말한다.


아집(我執)의 작용(作用)이 고정화(固定化)되었다는 것은 자신(自身)을 위한 이기심(利己心)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하며 이러한 이기심(利己心)이 마음 속에 있음으로써 온갖 나쁜 행동(行動)을 할 수 있도록 작용(作用)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7말나識이 제6의識의 의지처(依支處)인 의근(意根)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은 말나식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영향을 받아 자기이익(自己利益)을 위한 모든 행동(行動)을 나타나게 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에 의하여 작용(作用)되는 아견(我見)의 현상(現像)은 보통 행동(行動)에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3) 아만(我慢)

 

 

아만(我慢)은 아치(我癡)의 번뇌(煩惱)에서 아집(我執)이 생기고, 아견(我見)에서 더욱 객관화(客觀化)된 번뇌(煩惱)이다.


나를 밖으로 나타내려는 심리(心理)가 싹 튼 것이며, 그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면 오직 자기(自己)만이 존귀(尊貴)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自己)보다 못하다는 태도가 은연중에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평등(平等)한 진리(眞理)에 대한 망각과 더불어 집착(執着)한 나를 거만하게 나타내는 심리적(心理的) 작용(作用)을 말한다.

 

이러한 아만(我慢)에는 자신이 남보다 수승하다는 아승만(我勝慢)이 있고, 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自身)이 고귀(高貴)하다는 아등만(我等慢)이 있으며, 그리고 실제로는 마음 속으로 자신(自身)이 높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나타내는 태도는 겸손한 체 하는 아열만(我劣慢) 등의 구별이 있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形態)로 자신(自身)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는 모두 아만(我慢)에 속한다. 


 

4) 아애(我愛)

 

 

아애(我愛)는 마음 속 깊이 집착(執着)한 자아(自我)에 대하여 참으로 소중하다고 애착(愛着)하는 정신작용(精神作用)을 뜻한다.

 

마음 속에 참다운 자아(眞我)를 망각한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비진리적(非眞理的)이고, 일시적(一時的)인 자아(假我)를 설정하여 고정적(固定的)으로 탐심(貪心)과 애착심(愛着心)을 야기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에는 사번뇌(四煩惱)가 항상(恒常) 야기하게 된다.

이들 사번뇌(四煩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두 나(我)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참다운 나에 대한 망각(痴)과 더불어 파생되는 망견(妄見)과 거만과 탐애 등의 심리작용(心理作用)을 사번뇌(四煩惱)라고 하는데 이들 심리작용(心理作用)은 항상(恒常) 자아(自我)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제왕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서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작용(作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집착(執着)된 나(有我)는 항상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실체(實體)는 영원(永遠)히 불멸(不滅)하는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심리작용(心理作用)을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煩惱)들을 모두 번뇌(煩惱)의 근본(根本)이 된다고 해서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뇌(煩惱)가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그밖에 가지와 같은 번뇌(枝末煩惱)를 야기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번뇌(煩惱)를 말라식과 더불어 시작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시이래(無始劫來)로 현재(現在)에 이르기까지 일시도 단절됨이 없이 야기하는 번뇌(煩惱)라고 일러오는 것이다.


참으로 이들 번뇌(煩惱)는 가장 미세(微細)하기 때문에 범부(凡夫)들의 지혜(智慧)로는 가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팔지(八地)보살 이상의 성인(聖人)들만이 알 수 있는 경지(境地)라고 전해온다.


그것은 이들 번뇌(煩惱) 가운데서도 아치(我痴)는 평등일여(平等一如)의 진아(眞我)에 대하여 최초(最初)로 착각(着角)하는 번뇌(煩惱)에 속한다.  

 

이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아직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번뇌(煩惱)로서 이러한 번뇌(煩惱)의 경지(境地)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지(境地)라고 한다.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미분화된 상태의 번뇌(煩惱)라는 뜻은 상분(相分)은 인식(認識)되어지는 대상이며, 견분(見分)은 능히 인식(認識)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意味)하는 것으로서 마음 속의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분별(分別)의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절대경지인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아치(我癡)의 번뇌(煩惱)로서 그 망각한 심리작용(心理作用)이 아직 객관화(客觀化)되지 않은 채 무명(無明)만이 나타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는 업상(業相)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원효대사와 현수대사 등이 주석한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의하면 업(業)이란 동념(動念)을 뜻하며, 일심(一心) 위에서 일념(一念)이 최초(最初)로 동요한 상태를 업상(業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미세한 경지를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유식학(唯識學)의 심분설(心分說)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음의 작용(作用)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함을 나타낸 것이다.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모든 심식(心識)의 인식내용(認識內容)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 사분설(四分說)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론(理論)은 매우 타당성이 있어서 기신론(起信論) 주석가들도 인용하고 있다.


가령 오관(五觀)을 통하여 객관계(客關係)를 인식(認識)할 때 마음 위에 떠오르는 영상을 상분(相分)이라 하고 동시에 그 상분(相分)을 상대로 하여 선악(善惡)의 내용(內容)으로 분별(分別)하는 작용(作用)을 견분(見分)이라 한다.

 

그리고 그 견분작용(見分作用)을 다시 자체(自體) 내에서 틀림없는지의 여부를 증명하는 작용(作用)을 자증분(自證分)이라 이름하며, 또 자증분(自證分)을 뒤에서 재증명하는 작용(作用)을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사분(四分)작용이 있는데 이는 주로 상대적(相對的) 인식내용(認識內容)을 설명할 때 많이 활용한다.

 

이에 의하여 상대를 떠난 절대(絶對)의 진리(眞理)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의 상대성(相對性)이 없는 경지(境地)인 것이며, 따라서 설사 진리(眞理)를 망각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객관화(客觀化)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에서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論理)에 의하여 기신론(起信論)의 업상(業相)의 상태나 유식학(唯識學)의 아치(我癡)의 상태가 서로 동일(同一)한 내용(內容)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의 사번뇌(四煩惱)는 매우 미세한 것이며, 동시(同時)에 이를 정화하는 데는 부단한 수행(修行)이 뒤따르게 된다.


이를 완전(完全)히 정화하려면 이른바 삼현(三賢)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으로도 불가능(不可能)하며, 적어도 십지보살(十地菩薩) 중 제7지보살(第七地菩薩)의 지위에 올라야 말나식에서 작용(作用)하는 아집(我執)의 번뇌(煩惱)가 겨우 없어진다.


그 밖의 법집(法執)과 미망(迷妄)의 습기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로서 구경각(究竟覺)을 증득(證得)한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해야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란 선천적(先天的)이며, 또한 원천적(源泉的)인 번뇌(煩惱)라는 뜻으로서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境地)에 이르러서 소멸(消滅)하게 되며 동시(同時)에 성불(成佛)의 경지(境地)에 오르면 완전(完全)히 정화되는 번뇌(煩惱)이다.

 

이러한 경지에 대해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의 성위(聖位)와 滅盡定의 禪定과 出世間의 경지에서만이 말라식의 번뇌가 없어질 수 있다'(阿羅漢 滅盡定 出世道 無有)'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한의 경지(境地)는 불타(佛陀)의 경지(境地)를 말하며, 또 멸진정(滅盡定)은 구경(究竟)의 정각(正覺)을 이루는 금강유정(金剛喩定)에 해당하는 선정(禪定)을 뜻한다.

 

그리고 출세도(出世道)는 속세적(俗世的)인 번뇌(煩惱)와 세간적(世間的)인 번뇌(煩惱)를 해탈(解脫)한 진리(眞理)의 경지(境地)를 뜻한다.


이와 같은 煩惱가 淸淨한 마음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 菩薩道의 修行力에 의하여 完全히 소멸(消滅)되고 정화(淨化)되니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진여성(眞如性)만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眞如性을 아무런 煩惱의 장애(障碍)없이 完全히 증득(證得)하고 관찰(觀察)하는 境地를 또한 見性이라고 한다.


見性이라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禪家에서도 말나식의 사량심(思量心)과 도거심(掉擧心)을 淨化하는 것을 禪定이라고 하였고 또 말나식의 煩惱를 完全히 淨化한 境地를 견성이라고 하는 思想을 발견할 수 있다. 
 

2. 말나식(末那識)의체성론(體性論)


마나스(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말라식의 사량(思量)은 삼량설(三量說)에 비하면 비량에 속한다.

 

비량이라는 말은 비(非)는 그릇 비(非)자로 해석하고 량(量)은 헤아린다는 말로서, 즉 인식(認識)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어떤 眞理를 認識할 때 恒常 그릇되게 認識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認識하여 根本的인 煩惱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이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미 말한바 있다.  그런데 사량(思量)이라는 뜻도 識의 作用에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8식(八識)에는 모두 思量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思量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識보다 지속적으로 思量의 作用을 야기하는 데 있다.


이제 말나식을 다른 識과 몇 가지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안식(眼識) 등 전5식(前五識)

 

이들 전5식은 思量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思量하는 作用은 하지 않으며, 또 五識의 心體는 그 作用이 간간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전5식은 항상(恒) 지속하고 심세한 思量心이 부족하다(恒審俱無).



* 제6의식(意識)

 

意識은 심세한 思量心은 야기하나 그 心體의 作用이 가끔 단절되는 識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를 보면 意識은 무상천(無想天)에 出生하면 思量의 作用이 단절되고 무상정(無想定)에 들면 역시 意識作用이 단절되며, 또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역시 意識의 作用이 단절되고 극심한 수면(極睡眠)에 들면 意識作用이 단절되며, 그리고 졸도하거나 의식불명(極悶絶)일 때 意識作用이 단절되는 등 이상의 다섯 가지 경우에 意識作用이 단절된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은 五位無心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세한 思量의 作用은 야기하지만 말나식과 같이 心體가 恒常 지속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량식(思量識)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다(審而非恒).



* 제8아라야識

 

아라야식은 그 體性과 作用이 恒常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思量의 作用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思量心이 될 자격을 잃게 된다. 



* 제7말나識

 

말나識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속과 심세한 思量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명실 공히 思量心의 자격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라야식과 같이 三界를 輪廻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思量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말라식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 항상 심세(審細)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제7말나식은 여타의 心識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作用을 恒常 야기하므로 이 識을 사량식(思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어떻게 思量의 作用을 일으키며, 그 思量의 내용은 무엇인지 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識이든 心識은 認識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認識의 대상으로 하여 思量하고 煩惱를 야기하게 된다.

 

세친논사(世親論師)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다.

 

다음의 제이능변(次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라식이라 이름한다.(是識名末那) 말라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依彼轉緣彼) 사량(思量)하는 것으로서 성(性)과 상(相)을 삼는다 (思量爲性相).



이를 解釋해 보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母體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自體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中心이 되어, 가령 어머니 태(母胎) 안에 태어날 때 人間의 모습으로 아라야식이 最初로 능히 變化한다고 해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 아라야식에 依支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心識의 本能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心識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依彼)하여 전생(轉)해 가지고

다시 認識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반연(緣彼)하며 사량하는 것이며

이것을 性質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량(思量)의 뜻은 아라야식의 참 모습인 무아(無我)의 경지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는 煩惱를 야기하는 것을 內容으로 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개운사 

 

종무소 02 - 926 - 4062


 

2009.12.09 02:07:49 | 내 블로그 담기
대현심   유익한 자료 모셔갑니다. 고맙습니다._(())_ ^^*
2009.12.10 23: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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