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비밀번호 로그인 | 회원가입
하만(何晩)거사
http://www.templevill.com/

haman    
25교구 (haman)
아름다운 사진
불교와 관련된 사진
25교구 신도회와 관련된 사진
불교문화재와 관련한 자료사진 등을
공유하고, 보실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 하만 합장
25교구신도회알림방
이런저런이야기
불교공부방
논단
항상 좋은글 남겨주셔서...
위없는 가르침이 담겨있...
안녕하세요. 적조월님!...
고려불화의 위대함은 매...
[모든 중생은 다 득도...
바람
ZERO POINT
해동마을
연승. 성원스님
달리는 큰법당
 25교구
흠설원
대한불교조계종제25교구본찰봉선사말사.
화이트칼라
청암
달리는 큰법당

고려불화의 화엄사상성

I. 현존 고려불화의 개관 

김영재(미술사상가, 철학박사)

 1. 範疇와 經典的 解釋                                      
 2. 樣式과 思想性

II. 고려불화와 화엄신앙사상
 1. 불화와 經卷신앙
 2. 토속신앙과 화엄세계

III. 彌陀淨土畵와 화엄사상
 1. 普賢行願品과 阿彌陀如來圖
 2. 普賢菩薩行願贊과 八大菩薩圖

IV. 고려불화의 화엄사상과 밀교의 교섭
 1. 華嚴神衆의 曼茶羅的 再構成
 2. 五方佛思想의 신라적 원형

V. 五臺山 화엄사상의 고려불화적 전개
 1. 文殊信仰의 初期密敎的 변용
 2. 화엄과 金剛界 曼茶羅의 互換性

結語
緖言

고려불화의 세계를 통하여 시대정신의 이름으로 자리잡은 불교 사상과 불교 신앙의 원형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이 글은 쓰여지고 있다. 그 실천적 방안으로서 불교의 교리와 사상 및 문화사적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관점에서 도상과 양식을 재해석하려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관례적으로 도상과 양식의 연구를 중심으로 문화사적 시대상황과 불교의 교리 및 사상을 인용하는 불교미술 연구와는 상반될 수도 있으려니와 미술의 불교가 아닌 불교미술이라는 본연적인 추구를 위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 논문에는 산스크리트와 빨리어 등의 표기를 위해 불전전산화 표준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불교의 시대적 정신의 반영이자 시대적 소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컴퓨터와 인터넷 환경에 친화적인 표기방식은 바로 미래세계 불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미술이 시대정신의 반영이라 함은 동시대 뿐만 아니라 통시적인 심미안이 배어 있다는 말이 된다. 고려불화는 물론 당대의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하되 삼국불교, 특히 신라불교의 신앙체계를 발전시킨 우수한 미술작품이자 신앙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고려인의 공감대와 미의식 및 신앙과 아울러 전시대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던 釋迦, 彌勒, 觀音, 阿彌陀, 地藏 등의 불 보살상이 華嚴, 法華, 淨土, 密敎 및 禪宗의 교리를 바탕으로 조성되었던 선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고려불화가 가장 많이 수록, 소개된 자료로 {高麗時代의 佛畵}를 들 수 있는데, 일본 및 구미와 한국에 소장된 133점의 불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기존의 자료를 거의 망라하고 있으므로 고려불화에 관한 한 현재로서는 대표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상기 133점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다른 불화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겠지만 이 범주에 속하건 않건 현존하는 고려불화의 대부분은 일본에 수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려불화의 분포를 논할 때는 일본인의 취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분포를 분석해보면 막상 일본인의 취향에 가까운 觀經變相圖나 밀교적 도상은 몇 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阿彌陀, 觀世音, 地藏, 釋迦, 羅漢 등 도상의 점수로 미루어보아 오히려 고려를 중심으로 신라까지 소급되는 불교신앙의 행태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즉 고려시대에 그려졌으며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유전되는 많은 도상들 중에서 무작위로 표집된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고려불화라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런데 이 133점의 불화는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불 보살 혹은 인물을 중심으로 분류되어 왔다. 이 분류에 준하여 살펴보면 아미타불 및 협시보살이 중심이 되는 淨土往生類가 110점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佛傳類가 14점, 화엄관계 불화가 6점, 그리고 밀교 및 민간신앙 3점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통념상 고려불화는 정토신앙을 중심으로 화엄, 밀교 등의 도상을 보여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도식적인 분류를 조금만 천착하면 거기에는 화엄사상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실례로서 아미타여래가 중심이 되는 고려 정토불화의 대부분은 정토사상보다는 화엄사상과의 긴밀한 교섭하에서  조성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좁은 의미에서는 영향이고 넓게 보면 화엄사상의 정토적 변용이라 할만하다.
사상적 배경의 예로서 중국의 澄觀과 宗密은 아미타불이 毘盧遮那의 덕을 나타낸다고 했다. 즉 阿彌陀佛 역시 文殊, 普賢과 마찬가지로 화엄주불 毘盧遮那佛의 自內證의 표상, 또는 의인화로 보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라면 아미타불화 역시 화엄사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井手誠之輔는 고려 귀족계급의 정토신앙이 淨土三部經보다 화엄경의 普賢行願品에 치중하며 고려불화에서 아미타불화의 중심사상이 된다고 본다. 그것은 보현행원품에서 보현의 서원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현행원품에서 그 서원의 대목을 보면, 

원하노니 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일체의 장애를 남김없이 떨어내고 저 아미타불을 親見하여 즉시 안락찰에 왕생하고자 하노라 (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했던 것이다.
또한 井手誠之輔는 阿彌陀八大菩薩圖가 普賢菩薩行願贊을 도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毘盧遮那의 협시인 文殊와 普賢은 물론이고 阿彌陀佛의 협시로 등장하는 觀音과 地藏, 그리고 彌勒을 비롯한 虛空藏, 金剛藏, 除障碍 보살 등이 모두 화엄사상에서 연원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고 보면 고려불화에 관한 한 아미타불과 팔대보살 뿐 아니라 극락정토와 관계되는 그림들 역시 화엄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불화에서의 禪宗畵에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선은 華嚴禪으로 불릴만큼 화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려불화에서 화엄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삼국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큰 흐름인 화엄사상이 분명히 한국의 불교미술과 나아가서는 고려의 불화에 어떤 형태로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통념적으로 慈藏이 도입하고 義湘이 학문적 체계를 수립했으며 均如, 義天, 知訥 등을 통해 사상체계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화엄의 난해한 교학적 배경만으로는 폭넓은 시대적 공감대와 그 原型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화엄사상에서 비롯하였으되 왕공귀족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화엄사상의 원형이 있을 것이다.
그 원형적 사고방식으로서 이 논문은 고려 뿐 아니라 신라의 불교사상이 집약되어 표상화했다고 보는 五臺山 사상 및 그 흐름에 착안한다. 즉 13세기에서 14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져서 오늘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고려불화가 고려의 시대상황과 불교신앙 뿐 아니라 그 분포와 사상성에서 다분히 전시대인 신라의 오대산사상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江原道 五臺山은 慈藏律師에 의해 文殊菩薩의 住處(sthaana)라고 알려졌으며 佛頭骨을 모신 淸淨曼茶羅(visudhaaM maNGDala)의 사상이 집약된 곳이다. 여기에 寶川 孝明 등에 의해 오방불사상에 의한 伽藍曼茶羅의 형태로 사찰이 건립된 곳이다. 그러므로 오대산 사상이란 불교전래 이전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토속신앙을 융섭하면서 당대 최고의 불교교학인 화엄을 근간으로 國王長壽와 君臣和合, 百穀豊饒, 百姓安泰라는 현실적인 이익을 초기밀교적인 세계에서 구축하려했던 사상을 일컫는다.


I. 현존 고려불화의 개관

한국의 전통회화 중에서도 고려불화는 신앙적인 깊이와 함께 대표적인 아름다움과 회화적 성취를 보여주지만 그 가치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78년, 일본 奈良의 大和文華館에서 열린 고려불화 특별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숱한 전쟁과 抑佛의 풍조 속에서 잊혀지거나 문화재 해외반출 등으로 국내에서 진품을 친견하거나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미비했던 저간의 사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서언에서 밝혔던 바를 부연하자면, 1997년에 발간된  {高麗時代의 佛畵}라는 책에는 고려불화가 133점이 수록되어 있다. 敎義的 유형에 따른 통념적 분포를 보면 淨土往生類(阿彌陀圖 47, 觀經圖 5, 觀世音 34, 地藏 20, 觀音地藏 2, 彌勒 2)가 110점, 다음이 佛傳類(羅漢 9, 釋迦 3, 如來 1, 涅槃 2)가 14점, 華嚴(毘盧遮那佛圖 3, 華嚴經變相圖 1, 藥師十二神將 2)관계 불화가 6점, 그리고 密敎 및 民間信仰(摩利支天2:日炎, 熾盛光如來1: 北斗七星) 3점 등이다.
먼저 이 통념적 기준에 따른 불화의 성격과 내용을 살펴보면서 특히 화엄과의 연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무릇 불화는 엄정한 교리와 고승의 해석이 반영된 도상의 명문을 통해 그 사상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특히 화엄사상의 단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範疇와 경전적 해석 

淨土往生類
정토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도상으로는 阿彌陀圖, 觀經變相圖가 있다. 所依經典은 淨土三部經, 즉 無量壽經, 觀無量壽經, 阿彌陀經이다. 뿐만 아니라 관음보살, 지장보살 및 미륵보살 역시 정토사상의 범주에서 논의된다. 왜냐하면 무량수경에서 미륵보살은 부처님의 위촉을 받아 미륵정토를 건설하며, 관음보살 및 지장보살은 아미타여래의 협시로서 정토, 즉 극락에 왕생하는 성중을 내영할 뿐 아니라 관음은 補陀落迦山 정토, 지장보살은 冥府와 연관된 내세사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왕생(sandhaavati)사상의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먼저, 아미타도는 아미타여래도, 아미타삼존도, 아미타팔대보살도로 그려진다. 도상의 형식으로는 說法形, 來迎形이 있다.

6 阿彌陀如來圖 大德10年(忠烈王 32, 1306), 絹本彩色, 162.5x91,7cm, 根津美術館·日本 東京都

아미타여래도는 현존 도상 133점 중에서 47점이 보고될 만큼 압도적으로 많이 조성된 도상이다. 頭光과 身光을 갖추어 靑蓮華臺座 혹은 구름으로 쌓인 6각 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설법인을 한 형태거나 내영도의 형식으로 그려진다. 
根津美術館本 阿彌陀如來圖에는 설법형의 예로서 화면의 아래 좌우에 금니로 명문이 씌어져 있다. 그런데 아미타여래를 향한 발원이 극락왕생과 아울러 현실적인 加被力을 빌고 있어 주목된다.

      (向右)伏爲 皇帝萬年 三殿行李速還本國之願新畵成 彌陀一幀
      (向左)施主權福壽 法界生亡兼及己身超生安養 同願道人戒文同願朴孝眞 大德十年

내용을 보면 시주 권복수가 당시 원나라에 있던 "三殿, 즉 왕과 태자 및 태자비가 (원나라로부터) 빨리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여 새로 아미타여래도 一幀을 조성하노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시주 이름 아래에 法界生亡, 즉 법계의 살아있는 존재와 죽은 존재들과 아울러 이 몸이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는 발원이 적혀있다. 원나라의 成宗 치세에 해당하는 大德 10년(1306)에 조성되었다.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여래도는 島津家 舊藏本 및 荻原寺 본 등을 들 수 있는데 가슴에는 吉祥海雲의 大人像으로 卍字(svastika)가 그려져 있으며 손에도 역시 대인상의 하나인 千輻輪文(diirghannguli)이 그려지기도 한다. 내영형식의 공통점은 내영성중이 구름을 탔다는 것이며 하나 혹은 두개로 나뉘어진 蓮臺위에 서서 왕생자를 인도하는 포즈를 취한다. 
아미타삼존도 역시 설법형과 내영형으로 나눌 수 있다.
설법형의 아미타삼존도는 獅子座 높은 대좌 위에 설법인을 한채 結跏趺坐하고 좌우에 관음과 세지보살을 거느린 설법도 형식으로 그려지지는 것이 상례이나 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그려지기도 한다.

8 阿彌陀三尊圈 至大2年(忠宣王 원년, 1309),絹本彩色, (各) 147.0x6l.5cm, 上杉神社 日本 山形縣 米澤市

上衫神社 소장의 아미타삼존도에는 壽壺堂 徐氏 供養으로 되어 있으며 "살아서는 복을 얻고 죽어서는 왕생하며 법계의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에게 利樂이 두루 미치기를( 現存獲福 過往超生 法界有情 同霑利樂者)" 비는 명문이 있으므로 아미타도 조성의 공덕이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삼존은 보통 관음과 세지보살을 든다. 관음보살은 보주와 정병을 들고 세지보살은 보주가 놓인 연화줄기를, 오른 손 바닥위에 경합을 올려놓은 자세로 표현된다.

15 阿彌陀三尊圖 絹本彩色, 87.8x45.3cm, 個人所藏 · 日本 京都市

그런데 이 설법형의 아미타삼존도에는 다른 삼존도의 관음 세지보살 대신 관음 지장보살이 그려져 있다. 이 양식은 설법도 형식으로는 유일하게 지장보살이 등장하는 삼존도이며 내영도 형식으로는 호암미술관 본에서 역시 지장보살이 그려져 있다.

18 阿彌陀八大菩薩圖 絹本彩色, 175.3×91.5cm, 東京藝術大學 · 日本 東京都

아미타팔대보살도 역시 설법형과 내영형으로 나눌 수 있다.
설법형으로는 높은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를 상단에 모시고 하단에는 보살들이 圍繞하는 형식이 보편적이다. 
팔대보살은 文殊 普賢, 觀音 勢至, 地藏 彌勒, 虛空藏 除蓋藏을 들지만 신앙이나 경전에 따라 약간씩 달라진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바뀌기도 하지만 관음과 세지보살 및 지장보살이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이 그림에서 머리를 깎은 僧形이며 특히 전면에 등장하는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또 지장보살은 Smithonian Institute 소장본 阿彌陀八大菩薩圖에서처럼 두건을 쓴 이른바 被巾形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극채색의 오채를 중심으로 하는 견본채색의 불화라는 전통적인 고려불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大德 11年(1307) 魯英이 그린 阿彌陀八大菩薩圖는 옻칠한 나무에 金線描로 그려졌으며 그림의 뒤쪽에는 지장보살도가 있어 앞뒤로 예배할 수 있는 구조인 것처럼 보인다.
내영형으로는 가운데 크게 그려진 아미타여래와 양쪽의 팔대보살이 화면에서 보아 왼쪽으로 서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淨敎寺本 아미타팔대보살에는 위쪽에 天蓋가 그려져 있고, 根津美術館本은 구름과 寶樹, 화면 아래의 蓮池가 그려져 있어 극락정토를 암시하고 있다.
아미타팔대보살의 권속으로 관음 지장이 소개될 때는 주로 정토사상과 및 地獄免避, 즉 지옥에 가지 말게 해주십사는 염원이 담길 때가 많다.

67 水月觀音圖, 至大3年(忠宣王2, 1310), 絹本彩色, 419.5×254.2cm, 鏡神社 · 日本 佐賀縣 唐津市

관음보살도에는 수월관음도가 중심이 되며 현재 호암미술관 소장본의 천수천안관음도가 한 점 남아 있다. 

100 천수천안관음도 견본채색 93.8cmx51.2cm 호암미술관

千手千眼觀世音은 천수관음(Sahasrabhuja), 혹은 대비관음이라고도 한다.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因陀羅-indra) 신이나 비슈누(vishnu), 쉬바(siva) 등의 힌두교 신들이 불교에서 변용된 것으로 본다. 五重二十七面의 얼굴과 천 개의 慈眼이 있으며 천 개의 손으로 일체중생을 구한다. 그러나  천수상은 보통 양쪽에 각각 20개의 손이 있는 상으로 조성된다. 손바닥마다 눈이 달려 있으며 한눈과 한 손이 각각 二十五有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천수천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으로 그려질 때는 42手像으로 생략되어 나타나는 경향이다.
이렇게 고려불화에 밀교계통의 천수천안관음상의 조성 예가 희소한 것은 밀교적인 의례가 성행했던 고려불교에서 볼 때 매우 뜻밖의 일로 생각된다. 오히려 고려불화에서는 善財童子(sudhana)가 등장하는 관음상이 더 많이 그려졌으며, 그것은 분명히 화엄경의 해석에 의한 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아미타불의 협시로서 지장보살은 대부분 오른 손바닥에 寶珠를 올려놓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긴 錫杖을 짚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좌상과 입상이 있고, 머리가 僧形인 경우와 두건을 쓴 이른바 被巾形으로 나뉘어 그려지는 경향이 대표적이다.

109. 地藏菩薩圖 見本彩色, 239.4x130.0cm 圓覺社, 日本 神奈川縣 謙倉市

地藏菩薩의 좌우에 錫杖을 든 道明尊者와 관복차림의 無毒鬼王이 경상을 받쳐들고 있다. 이 도상은 地藏十王經과 還魂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還魂記는 襄州 開元寺의 승려인 道明이 명부에 잘못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까 被巾形의 지장보살이 보이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無毒鬼王은 地裝菩薩本願經의  利天宮神通品에 보인다. 
地藏十王圖는 道明과 無毒鬼王 및 梵天과 帝釋天, 四天王, 閻羅大王과 五道轉輪大王을 포함하는 冥府十王 및 권속으로서의 判官 綠事 使者 등을 배치하고 때로 馬頭, 牛頭形의 獄卒과 鬼卒이 등장하기도 한다. 

119 觀音 · 地藏菩薩竝立圖 絹本彩色, 99,0x52.2cm, 西福寺 · 日本 福井縣 敦賀市

관음 지장의 병립도는 敦煌佛畵와 莫高窟, 大足石窟 등에는 많이 보이나 고려불화를 비롯한 우리나라 불교미술품에는 유례가 적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지장을 배치한 삼존의 형식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61 彌勒下生經變相圖, 至正10年(忠定王 2, 1350), 絹本彩色, 178.0x90.3cm, 親王院 · 日本 和歌山縣

이 彌勒下生經變相圖에는 悔前이라는 畵手가 1350년 "龍華三會에서 언제나 설법을 듣고 群生을 널리 제도한다"는 목적으로 그렸음이 명문으로 명기되고 있다. 
彌勒下生變相圖는 석존의 열반 후에도 성불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의 법회를 연다는 彌勒下生成佛經의 사상을 그린 것이다. 도상은 크게 3단구도로 볼 수 있는데, 가운데는 미륵삼존이 연화대위에 자리를 잡고 주위에 帝釋 梵天 十代弟子 十二神將이 圍繞한다. 위에는 天蓋를 중심으로 寶樹, 구름 위의 五佛, 奏樂天女가 그려진다. 아래로는 중간에 누각을 중심으로 윗 부분에는 두 용왕이 무릎을 꿇고 있으며 왕족이 출가하기 위해 삭발하는 장면, 미륵불이 하생하는 곳이라는 翅頭末城과 누각, 말, 코끼리가 끄는 寶輦, 전륜성왕 및  대신들의 모습이, 아랫부분에는 전각 앞의 탁자에 놓인 향로를 중심으로 귀인과 시녀 및 화면으로 향하여 오른 쪽으로는 추수와 청소하는 장면, 미륵의 아버지로 생각되는 장자가 바위 굴속에 앉아 있는 모습, 왼쪽으로는 두 마리의 소를 몰고가는 장면과 寶輦을 메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미륵사상은 정토삼부경에서 미래불로 소개되지만 화엄경에서도 선재동자가 순방하는 선지식의 하나로써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觀經圖
觀經圖는 變相圖, 혹은 幀畵로 그려지며 극락의 모습을 설명하거나 관상하는 내용이 중심이 된다. 관무량수경변상도와 관경십육관변상도로 나눌 수 있다.

53 觀經序分變相圖 絹本彩色, 150.5x113.2cm, 西福寺· 日本 福井縣 敦貿市

관무량수경변상도 혹은 관경변상도는 觀無量壽經에 나오는 摩竭陀國 王舍城(Raaja-gRha)의 비극이 주제가 된다. 하나의 화면에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동시 표현하는 병치형식으로서 이른바 異時同圖의 시각으로 그려진다. 樓閣이나 溶雲, 樹木 등을 이용한 장면전환을 유도하며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각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하나의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그려지고 있어 설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시각적 박진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왕위를 찬탈하려는 阿 世(ajaata$atru)왕자가 부왕 頻婆娑羅(bimbisaara)를 유폐한다.
2). 頻婆娑羅王이 석존의 도움을 청하자 석존이 木乾連(maudgalyaana), 富樓那(puurana)를 보낸다.
3). 석존이 보낸 富樓那가 왕을 위해 설법한다.
4). 阿 世 왕자의 어머니인 韋堤希(Vaidebii) 왕비가 頻婆娑羅 왕에게 몰래 延命할 먹을 것을 반입하다가 발각된다. 문지기로부터 전해들은 阿 世가 韋堤希를 칼로 해하려 하지만 月光과 耆婆 두 대신이 만류한다. 
5). 석존이 耆  山, 즉 靈鷲山(GRdhrakuuTa)에 계신다.
6). 유폐된 章堤希의 기도에 응답하려 木乾連과 阿難(aananda)을 좌우에 보필하고 帝釋天(indra), 梵天(brahman), 四天王(caartur-mahaa-raajikaa) 등과 함께 석존이 왕림한다.
7) 석존을 향하여 韋堤希가 호읍한다.

54 觀經十六觀變相圖 絹本彩色, 202.8×129.8cm, 西福寺 · 日本 福井縣 敦賀市

관경16관 변상도는 관무량수경에서 설해진 아미타여래의 극락정토를 관상하는  열여섯가지 관상법을 도해한 것이다. 日想, 水想, 地想, 樹想, 八功德水想, 總觀想, 華座想, 像想, 偏觀一切色身想, 觀觀世音眞實色身想, 觀大勢至色身想, 普觀想, 雜想觀 13觀을 총칭하는 定善義와 衆生의 根機에 따라 九品往生을 설하는 三觀의 散善義을 합한 16의 觀想(bhaavanaa)을 말한다.
觀無量壽經은 정토사상 뿐 아니라 阿彌陀 聖衆의 來迎思想과 蓮華生思想을 담고 있는 普賢行願思想으로 화엄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佛傳類
나한과 석가도, 여래도, 열반도를 편이상 佛傳이라는 범주로 묶었다. 나한 혹은 아라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가리키지만 나한도라는 이름으로 그려질 때는 불법을 수호하기로 서약한 아라한을 지칭한다. 연화대에 앉은 석가삼존을 중심으로 구름을 탄 16나한이 배치된 그림, 또 바위굴을 배경으로 석가삼존이 게시고 주위에 神將, 十代弟子, 聲聞 및 五百羅漢이 山水 中에 그려지기도 한다.
현존하는 나한도는 대부분 수묵담채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나한도가 선종화의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오백나한이라고는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림은 제23 天聖尊者, 제125辰寶藏尊者, 제170 慧軍高尊子, 제234 上音手尊者, 제379 圓上周尊者, 제413 傳聖住尊者, 第427願圓滿尊者, 제464□□養尊者 등이다.

4 釋迦三尊圖 本尊, 編本彩色, 217.8×112.7cn, The Cleveland Museum of Art, U.SA

그리고 이 범주에 넣었던 釋迦牟尼의 도상이 있다. 예시한 釋迦三尊圖는 釋迦如來圖와 文殊菩薩圖, 普賢菩薩圖의 세폭으로 구성되었지만 별개의 그림으로도 그려질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세 폭 모두가 독자적인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석가본존도는 阿難 및 迦葉이라고 생각되는 존자들이 옹위함으로써 석가삼존도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문수, 보현은 크기와 위의, 지물 등에서 별존의 형식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기실 문수보살은 반야경을 편찬했다는 보살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중국의 청량산, 즉 오대산과 한국의 오대산에서 별존의 형식으로 모셔지는 전설적인 보살이기도 하다. 보현은 여래의 중생제도 및 延命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제 사상들이 통합된 것이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이다. 그리고 통념상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화엄경의 해석에 따라 비로자나삼존도에서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66 佛涅槃圖 絹本彩色, 285,0x237.5cm, 最敎寺 · 日本 長崎縣, 重要文化財

열반도는 이 경우 그림의 가운데 열반 장면과 주위에 비통해하는 인물들, 화면의 아래 부분에는 사리를 나누는 장면 및 동물들이 묘사된다. 윗 부분에는 공양받는 석가여래의 모습과 허공에 올라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장면, 마야부인(mahaa-maayaa)에게 설법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현재 일본 상덕사본과 최교사본의 불열반도가 보고되어 있지만 확실하게 고려의 佛涅槃圖로 밝혀진 조성 예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기록상으로도 乾寧2年(眞聖女王 9年, 895)銘의 塔誌인 百城山寺前臺吉祥塔中納法 記에 [釋迦如來涅槃銅畵像一」과 東文選 권76의 「衿州安養寺塔重新記」(1383年)에 「塔內四壁 東藥師會 南釋迦涅槃會 西彌陀極樂會 北金經神衆會] 정도가 소개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香川縣 千光寺에 隆慶2年(1569)銘의 雙林涅槃圖가 알려져 있지만 釋迦八相圖 중의 하나이며 독립된 열반도는 아니라고 본다.

華嚴關係圖像
화엄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華嚴經變相版畵가 있지만 불화로는 毘盧遮那佛圖와 七處九會의 華嚴說法圖 및 華嚴神衆圖의 형식으로 그려진다.
毘盧遮那佛圖는 현재 상반되는 두 부류의 도상이 있다. 즉 전형적인 고려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쾰른 미술관 소장 毘盧遮那三尊圖와 禪畵와의 교섭을 시사하는 不動院所藏 毘盧遮那佛圖가 그것이다.

2 毘盧舍那三尊圖; Museum fur Ostasiatische Kunst, Kohln, Germany. 絹本彩色. 123.0×82.0cm, Museum fur Ostasiatische Kunst, Kohln, Germany.Inv. no. A 09,59. Photograph: Rheinisches Bildarchiv KohIn.

이 삼존도에는 智拳印을 하고 右旋 卍字가 가슴에 쓰여진 비로자나불을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있다. 문수보살은 如意를 잡고 있으며 보현보살은 경전이 올려진 연화줄기를 잡았다. 菊竹淳一은 이 비로자나삼존도의 세부표현에서 다른 도상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僧祗支(saMkakSika)를 묶은 장식의 표현은 根津美術館의 阿彌陀如來圖와 阿彌陀三尊圖, 鶴林寺와 石馬寺 및 萬松寺의 阿彌陀三尊圖, 萬松寺本 藥師如來圖, 寶慶寺의 如來三尊圖 등 정면관의 본존상에서 볼 수 있으며, 약간 처진 무릎의 표현은 鶴林寺의 阿彌陀三尊圖, 松尾寺의 延祐7年銘(1320) 阿彌陀八大菩薩圖, 石馬寺의 藥師如來圖 등과 유사하며, 가사 끝단의 逆山字形 表現은 1306年 根津美術館의 阿彌陀如來圖, 鶴林寺의 阿彌陀三尊圖, 그리고 覇馬寺의 藥師如來圖 등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전형적인 고려불화의 성격상 하나의 草本에서 다른 초본이 만들어지며 그 초본들을 바탕으로 불화가 조성되었던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부동원 소장 비로자나불도는 고려불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벗어나 자유로운 자세와 파격적인 구도로 禪畵와의 교섭을 시사해준다.

3 毘盧舍那佛圖: 絹本彩色, 175.9x87.1cm, 不動院: 日本 廣島市

그리고 화엄경 변상도가 있다.

1 華嚴經變相圖; 麻本彩色, 165.0×58,0cm, William Sturgis Bigelow Collection Courtesy,  Museum of Fine Art, Boston, U.S.A

이 화엄경변상도는 현존 고려불화에서 유일한 비로자나 說法會圖이다. 대부분의 화엄경 변상도가 경전의 변상도 혹은 판화로서 經卷信仰을 충실히 도해한 데 반하여 이 화엄경 변상도는 우수한 회화적 성취를 보여준다. 도상에서 살펴보면 설법인의 비로자나를 圍繞한 문수 보현 및 彌勒, 普眼, 金剛藏 보살 및 覺 首 慧등의 이름이 붙은 보살명이 보인다. 아래 공간에 비로자나를 향하여 좌정한 뒷모습의 인물을 善財童子로 본다면 그 나머지 성중은 화엄신중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은 의도적인 좌우대칭으로서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많은 수량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려 화엄교학의 엄정한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57 藥師三尊十二神將圖 絹本彩色, 147,5x88.2cm,個人所藏 · 日本 和歌山市

그리고 약사여래(bhaiSajyaguru)는 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그리고 藥師如來本願經 등의 所依經典에 의해 그려진다. 약사여래는 병을 고치고 病苦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믿어졌다. 왼손 위에 藥壺(樂器)를 올려놓은 채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일광보살, 월광보살, 신장, 보살, 십대제자로 보이는 승형의 인물 등이 묘사된다. 구체적인 여덟 보살의 명칭은 언급되지 않지만 灌頂經에 등장하는 文殊, 觀音, 勢至, 無盡意, 寶壇華, 藥王, 藥上, 彌勒菩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密敎畵 및 民間信仰의 佛畵

122  摩利支天圖 見本彩色 97.9×54.5cm, 聖澤院 · 日本 京都市

마리지천(Mariici)은 野馬, 日炎, 혹은 陽炎이라 譯하며 아지랑이를 일컫는다. 摩利支天經에 의하면 天女와 같은 형상으로 寶冠 瓔珞으로 장식하고서 天扇을 들었다고 했다. 고려사 세가에는 11회의 摩利支天道場이 기록되어있다.

63 熾盛光如來往臨圖 絹本彩色 126.4×55.9cm, Feellosa-weld collection courtesy, Museum of Fine arts, Boston, U.S.A.

熾盛光如來往臨圖에는 소가 끄는 寶車에 결가부좌한 熾星光如來가 있고 그 주위에 北斗七星, 9曜星, 12宮, 28宿 등이 표현된다. 그림에서는 日月火水木金土曜星, 羅 , 計都星 등 15상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으로 치성광여래의 寶車를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구도와 배치의 여래도의 원형을 敦煌의 불화로서 현재 大英博物館에 소장된 熾星光佛五星圖에서 볼 수 있으므로 그에 준하여 이 그림은 치성광여래도로 생각되고 있다. 치성광불은 大聖妙吉祥菩薩說除災敎令法輪에 의하면 부처의 毛孔으로부터 나오는 大光明으로 天變을 다스릴 수 있다 하여 중국 唐, 宋을 거쳐 元代에 이르기까지 매우 성행했던 신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모공으로부터 광명이 나온다는 표현은 화엄경에서 보편적인 표현이므로 그 발상과 표현이 화엄경의 사상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고려불화를 개관하면서 약간만 주의를 기울이면 상당 부분 화엄사상과의 연관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양식과 사상성

고려불화는 현재 130여 점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조에는 많은 불화가 조성되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을 보더라도 毅宗은 天帝釋, 觀音菩薩을 많이 그려 中外寺院에 분송하였고, 白善淵은 毅宗의 行年에 준하여 觀音40軀를 그렸다 했으며, 化佛點眼의 의식을 궁중에서 행했다는 기록들이 보이고 있다. 또 趙仁規는 繪 梵像을 다작하였다 했으며, 忠烈 忠善代에 化佛을 元朝에 많이 納貢하였으며 공민왕은 普賢達磨觀音 등을 친히 그렸다 했으니 그 불화들이 어딘가에서 나타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1935년에 고유섭은 전국의 사찰 들에서도 무수한 불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불화들을 나열하고 있다.

安和寺-彌陀殿 兩厦의 東  祖師像, 西  地藏像(高麗圖經)
廣通普濟寺-羅漢寶殿 兩 의 金仙文殊普賢羅漢 五白軀畵像(高麗圖經)
海州 崇山寺-麗太祖 6年에 福府卿 尹質이 後粱으로부터 齊來한 羅漢五百軀 畵像(麗史)
興王寺-文宗 30年에 崔思訓이 宋相國寺壁畵를 移模한 壁畵(高麗圖經 圖畵見文誌)
禪源寺-毘盧殿의 釋學仙筆의 東西壁畵, 魯英筆 畵屋, 釋息影庵의 北壁畵(槿域書畵徵)
松都 雲居寺-達摩畵像(陽村集)
驪州 神勒寺-金仙肖像(陽村集)
法王寺-毗盧文殊普賢 及 華嚴諸祖像(陽村集)
五臺山 西臺 水精庵-彌陀八代菩薩像(陽村集)
廣敎院-盧舍那, 釋迦, 奬基二祖 及 海東六祖像(金山寺慧德王師)
安禪報國院-五百羅漢 畵像(法印國師碑)
興德寺-恭愍王筆 釋迦出山像( 齋叢話)
衿川安養寺-藥師會 釋迦涅槃會 彌陀極樂會 金經神衆會(輿地勝覽)

위에 예시한 도상들은 멸실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현존하는 130여 점의 불화는 대개 13세기에서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918-1392)의 후기에 해당되는 시대로써 井手誠之輔는 1300년을 전후하여 자연주의적 화풍으로부터 장식성이 강조되는 시기이며 왕공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궁정양식,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사원양식, 민간결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양식이 확연하게 구분되며, 밀교도상이 나타나는 점 등이 중요한 변화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양식의 첫 번째로써 궁정양식은 根津美術館 소장의 아미타여래도를 들 수 있다.

6 阿彌陀如來圖 大德 10年(忠烈王 32,1306) 絹本彩色, 162.5x91.7cm, 根津美術館: 京都市

명문에 의하면 이 아미타여래도는 大德 10年(1306) 權福壽가 시주하여 조성되었다. 목적은 원나라에 체재중인 왕과 왕자 및 왕자비의 조속한 귀국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상의 성격상 고려시대에 分所의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던 圖畵院의 畵員이 그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화원은 破閑集의 李寧의 기사 중에 睿宗時畵局이란 구절과 東文選 李仁老 李相歸休圖贊序에 畵局朴子雲의 句節이 있어, 畵局으로도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泉屋博古館의 水月觀音圖에는 至治 3年(1323) 內班從事 徐九方이 그렸다는 金泥銘이 있다. 또한 鏡神寺의 수월관음은 至大 3年(1310) 王叔妃 김씨의 발원으로 畵師 內班從事 金祐文과 翰畵直待詔의 李桂, 林順, 宋連 등 色員에 의해 그려졌는데 이 色員들은 도화원 화원을 일컫는 것으로 추측된다.

67 水月觀音圖, 1310年, 絹本彩色, 419.5x254.2cm 日本 鏡神寺

이른바 궁정양식은 描線이 탄력적이면서도 강인하고, 색채가 풍요하며 높은 명도를 보여주며, 색감에 있어서 뛰어난 농담의 구사에 의해 입체감 및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하며 문양묘사가 세밀하며 뛰어난다고 평가되는데, 이 시기를 즈음하여 밀교도상이 성행하므로 그 상호교류나 영향을 암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원양식으로는 松尾寺의 阿彌陀八大菩薩圖를 들 수 있다.

16 阿彌陀 八大菩薩圖, 1320年, 絹本彩色, 177.3x91.2cm, 日本 松尾寺

金泥銘에 의하면 延祐 7년(1320) 5월 모일에 安養寺의 住持인 大師 □山人 雲友가 화상의 조성에 간여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 大恩寺 觀經序分變相圖(1312)에는 □光茶院의 비구 覺先의 이름이 보인다.

52 觀經序分變相圖 1312年, 絹本彩色, 133.3x51.4cm 日本 大恩寺

法恩寺의 阿彌陀三尊圖에는 天曆 3年(1330) 5월에 香徒等 金思達 松連 草兼 古火□... 등의 명문이 보이므로 김사달 등의 신도들이 조성에 간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9 阿彌陀三尊圖 1330년, 絹本彩色, 119.4x64.3cm, 日本 法恩寺

이른바 사원양식은 묘선은 약간 섬약하며 색채표현 역시 생경하고 공예적인 정교한 문양이 형식화되어 궁정양식을 목표로 하면서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민중양식이 있다. 上衫神社의 阿彌陀三尊圖에서는 화면에 직접 묵서로 至大 2年, '壽壺堂 徐氏의 아들 冬과 그 아들 冬을 따라서 申季良이 가재를 털어 工綵에 명하여 그리게 했다(壽壺堂徐子冬 子(□=冬)從申季良 以家財命工綵繪)'라 명기했다. 이 도상에 있어 삼각형의 안면구성이나 세밀한 자태, 화려하고 선명한 채식 등은 궁정양식이나 사원양식과 다르므로 민간 화공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나뉘어진 세 양식들은 송이나 원의 양식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려 특유의 양식도 있다. 菊竹淳一은 島津家 舊藏本의 아미타여래 가사에 그려진 17.0cm의 커다란 연화원문에서 法恩寺本의 아미타여래의 가사에 보이는 2.9cm의 당초문원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고려불화의 장식적 취향이 잘 드러나 보인다고 본다.

26 아미타여래도, 지원23년(충렬왕 12=1286)견본채색, 203.5x105.1cm, 일본 도진가 구장
9 아미타삼존도 1330년, 견본채색, 119.4x64.2cm 일본 법은사

그런데 고려불화에서 특징적인 면은 대부분의 도상들이 화엄사상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鉤勒嗔彩와 背彩로 이루어지는 극채색의 불화와 沒骨法에 의한 氣韻生動의 筆意가 강조되는 水墨淡彩 및 극채색의 禪畵的 佛畵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
먼저 극채색의 예로서 관음보살은 구륵진채, 즉 模本을 따라 먼저 선이 그려진 후에 선의 안쪽을 石彩 등으로 施色한 경우이다. 그리고 背彩란 얼굴 등을 보다 밝게 보이게 하며 그려진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오래 보존하기 위해 화면의 뒤쪽에 하얀 불투명 안료를 바르는 기법이다.
그런데 관세음(avalokite$vara) 보살은 많은 대승경전에 등장하지만 法華經(saddharma-puNGDariika-suutra)보다는 華嚴經(buddha-avataMsaka-mahaavaipulya-sutra)의 사상이 보다 잘 반영되어 있다.

67 水月觀音圖 1310年, 絹本彩色, 419.5x254.2cm 日本 鏡神寺

먼저 법화경 普門品에도 관음의 위신력에 대한 설법이 있다. 이를테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설령 큰 불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능히 태울 수 없다. 관음보살의 위신력이 있기 때문이다(設入大火火不能燒 由是菩薩威神力故), 모두 나찰난에서 해탈을 얻으며 (皆得解脫羅刹之難), 족쇄와 형틀 등이 몸을 조이더라도 모두 부서져 즉시 해탈을 얻는다(杻械枷鎖檢繫其身 稱觀世音菩薩名者 皆悉斷壞卽得解脫), 원적의 재난으로부터 마땅히 해탈을 얻으리라(於此怨賊當得解脫) 등이다. 그러나 법화경의 이 위신력을 암시하는 내용이 고려불화에 그려진 사례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반면 화엄사상과 관련이 있는 도상들은 관음보살도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또한 관음화에서 볼 수 있는 대나무와 楊柳 및 바위산은 北魏 孫敬德述의 佛說高王觀音經에 '해중에 보타산이 용출하니 관음보살이 그 중에 계시다. 세 가닥 紫竹을 벗삼아 一枝楊柳가 먼지바람을 씻는다(海中湧出普陀山 觀音菩薩在其間 三根紫竹爲伴侶 一枝楊柳 塵風)하여 三根紫竹으로 되어 있어 도상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양식은 敦煌本 大英博物館 水月觀音圖, 기메미술관 소장의 天福 8年銘(943) 水月觀音圖, 北京 古宮博物館의 白衣觀音圖, 四川省 博物館의 柳枝觀音圖 등에서 예를 찾을 수 있어 돈황에서 발원하여 중국내륙을 거쳐 고려에 파급되었으리라 추측되기도 한다.
여기서 버들가지는 東晋의 竺難提가 譯한 請觀音經에서 유래한다.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관음보살을 뜻하는 楊柳觀音은 중생이 소원을 좇는 것이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쏠리는 듯 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보통 버들가지를 손에 들거나 정병에 꽂아 둔다. 또 請觀音經에 의하면 毘舍離(Vai$ali)城의 탐욕스런 月蓋長子의 딸이 돌림병으로 죽게 되자 장자는 석존에게 눈물로 매달렸다. 월개장자가 석존의 가르침을 좇아 아미타불에게 치성하자 아미타불이 관음 세지 두 보살을 거느리고 광명으로 비추어준다. 그러자 딸의 병이 낳았을 뿐만 아니라 성중의 돌림병이 사라졌다. 성안의 사람들이 버들가지와 정병을 관음보살에게 바치자 보살은 十方諸佛救護神呪經을 설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려불화에 그려진 수정염주, 여의보주, 쌍죽 등은 다분히 화엄과의 연관을 암시하고 있다. 즉 三國遺事에는 海東華嚴初祖라고 불리는 義湘에게 龍天八部侍從이 水晶念珠를, 東海龍이 如意寶珠를 바쳤다 했으며 觀音眞身이 雙竹이 난 座山山頂에 佛殿을 지으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에서 발견되는 선재동자는 물론이거니와 龍天八部侍從 및 海龍 역시 화엄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69 水月觀音圖 絹本彩色 227.9x125.8cm 日本 大德寺

이러한 사례들은 도상을 통해 의상의 화엄사상과 신라 관음신앙과의 연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삼국유사에서 관음신앙은 풍성한 應身靈驗譚을 남기고 있다. 그런 만큼 백성들이 조성한 관음도상도 많았을 것이다.
경주 南巷寺의 十一面觀音畵像은 비구니로 현신하여 憬興의 스트레스를 풀어 병을 고쳐 주었다(卷第五 感通 第七: 憬興遇聖). 栢栗寺의 大悲觀音像은 沙門의 몸으로 나타나 이국 땅에 잡혀간 화랑인 夫禮郞과 安常을 구해 왔으며(卷第三 塔像第四: 栢栗寺) 敏藏寺의 관음상은 승려로 나타나 長春을 오나라 땅으로부터 데려 왔다(卷第三 塔像第四: 敏藏寺). 洛山寺의 관음은 속세의 여인을 사모하는 調信의 미망을 깨우쳐 주었다(卷第三 塔像第四: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衆生寺의 大悲觀音像은 崔殷誠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고 난리 통에 젖을 먹여 길러 주었다(卷第三 塔像第四: 三所觀音 衆生寺).
나아가 관음보살은 응신하여 수행하거나 성불을 도와주기도 한다. 廣德이 먼저 성불한 후 관음화신인 광덕의 처는 嚴莊을 일깨워 元曉의  觀法을 배워 성불하게 한다(卷第五 感通 第七: 廣德  嚴莊). 白月山의 努 夫得과   朴朴은 화신 관음의 영험으로 성도한다(卷第三 塔像第四: 南白月二聖  努 夫得    朴朴). 백성들이 이토록 관음신앙에 독실했다면 분명히 이러한 영험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극채색의 그림은 영험을 비는 사람들의 염원을 반영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불화에서의 羅漢圖는 석가나 비로자나의 성중으로 그려질 때는 극채색으로 그려지지만 그 외의 경우는 대부분 수묵담채의 이른바 禪畵 형식으로 그려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131 釋迦三尊 및 十六羅漢圖 絹本彩色 90.0x44.5cm 日本 根津美術館
126 五百羅漢圖 1238年 絹本水墨淡彩 55.1x38.1cm 韓國 國立中央博物館

禪畵란 禪宗畵를 말한다. 선종은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하는 만큼 교리를 해설하여 보여준다는 입장보다는 不立文字와 敎外別傳을 중시하며 그 표현양상 역시 수묵화의 화론에 따른 氣運生動과 逸氣를 앞세우는 만큼 특히 고려불화에서 經典이나 經卷信仰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것은 화엄사상이다. 그것은 한국의 선종이 화엄의 바탕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禪法은 法郞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迦智山門의 開山祖인 道義(?-821-?)가 南宗禪   계통의 祖師禪을 전하면서 본격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道義는 馬祖道一의 법맥을 이은 西堂智藏의 南宗禪 즉 祖師禪 계통이다. 그러나 전래보다 중요한 것은 선과 화엄의 관계이다. 신라에서의 禪과 화엄의 만남은 선덕왕대(632-647)에 東土 제4조 道信의 문하에서 선종에 최초로 귀의한 法郞과 그 제자인 信行(704-779)에게서 예를 볼 수 있다. 信行의 비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선은 화엄과의 긴밀한 교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麗末鮮初 九山禪門의 조사들은 어떠한 형태이건 화엄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후 고려의 均如는 希朗법문의 北岳법손으로서 觀惠법문의 南岳을 회통하면서 동시에 법상종의 세력을 흡수하려는 목적으로 性相融會사상을 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의상계열의 화엄교학이 되살아나게 되며 이어 화엄종의 승려 坦文(900-974)에 의해 敎禪, 즉 화엄과 선의 일치가 시도된다. 이어 普照知訥에 이르러 禪嚴일치의 이른바 화엄선이 성립하게 된다.
知訥은 圓頓成佛論에서 華嚴成起觀을 수립하며 그 바탕위에서 頓悟圓修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禪敎一致思想이라면, 다시 선과 화엄이 회통되는 頓悟漸修를 주장하는 普照禪은 禪嚴一致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불화에서의 선화 역시 화엄의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不動院 所藏의 毘盧遮那佛圖에서는 극채색의 尊像畵와 수묵담채의 나한도를 절충한 듯한 양식이 발견된다.

3 毘盧舍那佛圖 絹本彩色, 175.9x87.1cm, 不動院 : 日本 廣島市 

이 도상에서는 盧舍那佛이 정각을 이룰 때의 方大光明과 毛孔에서 化身雲이 나온다는 화엄경의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화불이 문자와 문양의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화면 윗부분에 萬五千佛, 大平이란 글자 내부의 화불군, 二佛竝坐像의 多寶塔 좌우의 化佛群과 五菩薩, 十九佛, 五十三佛, 寶勝七佛, 十方小佛, 三身佛, 六方佛, 五台佛 그리고 七世佛, 九世佛 등 短冊形 안에 먹으로 화불들의 이름을 써 넣었다.
비로자나불은 마치 족자 그림처럼 대지와 다르게 그려진다. 身光은 원형이라기보다 양측이 짤린 상태이고 頭光은 녹색으로 처리되어있다. 그런데 비로자나불은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뒤쪽의 폭포라도 玩賞하는 듯한 포즈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高士觀瀑圖에 그려진 高士나 혹은 禪僧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그림만으로 본다면 마치 자유로운 구성에 의한 禪畵的 구도에 고려불화의 특징적인 五彩에 의한 設彩를 보여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수묵으로 그리면서 비로자나불의 상호와 화엄화적인 도상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禪畵와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화엄의 도상성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化佛群 사이와 화면사이에 빗살무늬의 佛字 및 X선 촬영을 통해 본 卍字는 비로자나의 光明이 시방세계에 遍照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도상은 화엄사상의 충실한 도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상의 선례로 菊竹淳一은 5세기 北魏 雲岡石窟 중에서 曇曜五窟의 중앙부에 있는  第十八洞 本尊像, 돈황 428굴의 北周時代 法界人中像 등을 들고 있다.

參考圖版: 盧舍那佛 法界人中像 敦煌 428窟, 北周時代

그리고 菊竹淳一은 양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뒤를 돌아보는 본존의 자세가 日本 國淸寺 所藏 絹本水墨淡彩의 長帶觀音圖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이러한 유형의 관음도가 상당히 많이 그려졌음을 암시한다. 
특히 이 長帶觀音圖에서 중국의 宋末 元初에 활약했으며 일본에 왔던 禪僧인 兩澗子曇(1249一1306)의 贊文을 주목한 菊竹淳一은 이 觀音圖가 毘盧遮那佛圖와 기원이 같으면서 선종계의 도상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측한다.

II. 고려불화와 화엄신앙

일반적으로 불화는 엄격한 교리해석에 따라 철저히 훈련받은 佛母 혹은 畵工에 의해 그려진다. 먼저 당시의 신앙행태 또는 경전의 사상이 고승들에 의해 정립된다. 불모는 신앙이나 경전의 사상에 대한 불 보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구성을 고승으로부터 듣고 불화의 초안을 그리게 된다. 이어 고승과 불모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불화가 제작된다.
이 과정에서 도상의 相好와 構圖, 表現技法과 彩色이나 顔料 및 표현을 위한 재질이나 도상의 크기 등을 결정하는 전 과정에서 佛母의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려진 불화에서도 언뜻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 불교의 교리와 상관이 없는 문양이나 도상들이 많이 그려진다. 물론 이러한 도상들은 고승들의 교리해석과는 상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고려불화에 三足烏, 달토끼(月兎), 鳳凰, 龍, 十長生 등이 그려지는데 이 도상들은 불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토속신앙의 상징들로서 불교에 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삼국을 비롯한 고려에서 토속신앙이 불교에 습합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불교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불교 자체가 인도에서 폭넓은 포용력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밀교였다. 인도에서 오랜 신봉의 대상이었던 바라문교가 불교교단의 번성에 따라 침체하게 되자 바라문교는 인도의 민간신앙 뿐만 아니라 불교까지 포섭한 힌두교로 변신하여 다시 번창하면서 불교교단을 위협하게 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불교가 힌두교 및 인도의 민간신앙을 다시 포섭하여 재정립된 것이 밀교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卽身成佛을 목표로 하는 出世間의 悉地(siddhi)와 함께 現實的 이득을 줄 수 있는 世間的 悉地를 바탕으로 어느 나라의 민간신앙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종교의 바탕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특히 현실적 이익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神呪(dharani) 혹은 密呪신앙은 불교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이 현실적인 이익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高句麗의 故國壤王과 백제의 阿莘王은 백성들에게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崇信佛法求福)'고 교시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려인들은 신라의 예를 따라 사경, 불상 및 불화의 조성에 힘썼다. 그리고 고려불화에 공덕을 기리는 염원을 담아 명문을 남겼다. 나아가 토속신앙의 요소를 불교에서 찾고자 했다. 그것이 불교의 넓은 포용력에 의해 불화의 요소 요소에 남아 있는 것이다.

  1. 불화와 經卷신앙

高麗史 列傳에 의하면 仁宗 8年 西京 林原宮城 八聖堂에 조성된 화상은 토속화한 불 보살의 모습이 해설과 함께 그려진다. 
여기서 文殊師利는 백두산에 주재하는 太白仙人으로, 석가불은 龍圍嶽의 六通尊者로 묘사된다. 나아가 고구려 평양의 仙人은 練燈佛(Diiparhkara), 木覓山 仙人은 毗婆尸佛이라 하여 전생불로 배대된다. 그리고 金剛索菩薩(vajra-paa$a)과 勒叉天王(lakSaa-yakSaadhipa), 不動優婆夷(upaasikaa) 역시 松嶽, 甑城嶽, 頭嶽 등 이 나라 산의 居士, 神人, 天女로 생각되었음을 알려준다.
 
一曰 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
二曰 龍圍六通尊者實德釋迦佛
三曰 月城嶽天仙實德大辨天神
四曰 句麗平壤仙人實德練燈佛
五曰 句麗木覓仙人實德毗婆尸佛
六曰 松嶽震主居士實德金剛索菩薩
七曰 甑城嶽神人實德勒叉天王
八曰 頭嶽天女實德不動優婆夷
 
물론 이러한 牽强附會는 묘청, 이중부, 정지상 등이 국운연장을 빌미로 서경천도를 주장하기 위한 술책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도교적 선인과 토속적 산신신앙, 그리고 밀교적 불보살이 혼합된 신앙 행태를 볼 수 있게 된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도상의 모습이기는 하다. 종교는 어떤 형태이건 그 종교가 깃들인 곳의 문화적 공감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林原宮城 八聖堂의 경우는 묘청 등의 무리가 왕과 백성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했던 종교적 도상이므로 그 배경에는 불법을 통한 깨달음과 해탈 등의 상근기적 열망보다는 분명히 서경천도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현실적 이익이 강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이 복을 줄 수 있으리라는 신념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고구려 및 삼국에 유입되었던 많은 密呪經典들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 번역되었던 경전들 중에서 密呪經典(dharni-suutra)은 安世高와 支婁迦懺의 초기역경에도 들어 있었다. 安世高는 147년 後漢 建化 1년 洛陽에 와서 주로 小乘經典에 해당되는 95부 115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지루가참은 167년 後漢 永康 1년 洛陽에 와서 般舟三昧經, 無量淸淨平等覺經 등 23부 67권을 번역한 月支國 승려이다. 고구려의 불교 공전이 372년인 만큼 불교의 초전 당시에도 이 땅에 밀주경전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물론 어떠한 밀주경전이 어떤 배경에서 성립되었으며 어떻게 중국과 삼국으로 유입되었는지는 현재 쉽지 않다. 그러나 高句麗 및 三國佛敎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유형의 경전명을 나열한다면 佛說八陽神呪經, 佛說八吉褙神呪經, 摩訶般若波羅密大明呪經, 大方等大集經 陀羅尼自在王菩薩品, 金光明經. 佛說除恐災患經, 拔-切業障根本得生淨土神呪, 佛說藥師如來本願經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삼국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이러한 불법에 대한 인식들을 살펴보면 불법이 다분히 세간적 실지, 즉 현실적 이익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도 있으며, 林原宮城 八聖堂의 예에서 보듯 불교는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그 문화권의 실정이나 이해에 맞게 번안될 수 있는 탄력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불교는 전래 당시까지 이 땅에 자리잡고 있었던 토속신앙에서 보자면 외래종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토속신앙과 불교와의 마찰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다. 한 예를 들자면 삼국유사에 수록된 圓光의 설화가 있다. 圓光의 西學을 도와준 여우귀신에 대하여 신라 재래의 토속신이 처음에는 불교의 神呪에 거부반응을 보이다가 이윽고 불교에 귀의한 사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유사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례는 숱하게 많거니와 불교는 어느 문화권에 전래되건 간에 마찰을 겪기도 하겠지만 무한한 普化應同의 포용력을 발휘하여 그 토속신앙까지 융섭하게 되는 것이니 고려불화에 나타나는 민간전승의 문양과 도상은 그 융섭의 표상적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포용력의 또 다른 예로서 불교와 나란히 모셔지던 제사를 들 수 있다.
고구려에서도 역시 불법과 귀신을 함께 섬겼다. 또 고구려에서는 佛宇, 塔婆와 始祖神과 扶餘神의 神廟가 동시에 건축되었다. 또한 불교 수용 이후에도 10월에는 왕이 제사장이 되어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예들을 보면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공존은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속신앙적인 제사는 불교와 별다른 마찰이 없이 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의 왕들은 불교적인 법석과 도량을 연설하면서도 토속적인 산천, 조상에 제사지냈다. 민간에서는 액막이 주술이 불교의식과 나란히 행해지기도 했다. 고려도경에는 작은 나무배에 불경과 말린 식량을 싣고 재앙을 떨어내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지는 방술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가 특정의 문화권과 습합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본래의 엄정한 교리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토속화라 하더라도 經卷信仰(suutra-$raddhaa)의 바탕에서 유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조상숭배사상과 습합된 靈駕薦度와 地藏齋 등의 의례는 불교의 교리와 근본적으로 위배되지만 그렇다고 교리와 신앙을 훼손하지 아니한다. 그것이 불교의 포용력이었다.
먼저 조상숭배는 우주, 천체 및 靈獸瑞鳥 등의 신앙과 함께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면 일찍이 南解次次雄 3년에 朴赫居世의 始祖묘가 세워졌다(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고 했고, 고구려는 古記에 이르기를 동명왕 14년 추팔월에 왕모 유화가 동부여에서 붕하자 그 왕인 금와가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신묘를 지었다 했으며(古記云, 東明王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四仲之月에 왕이 하늘 내지 오제의 신에 제사를 지냈으며 仇台, 優台, 혹은 東明 등으로 불리는 始祖廟를 國城에 세워 4歲를 제사지냈다(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고 했으므로 조상숭배는 최소한 삼국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신라의 경우, 炤知麻立干 495년에 시조묘에 대한 御祀는 神宮으로 바뀐다. 즉 炤知麻立干 2년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9년에는 시조의 탄생지인 奈乙에 신궁을 안치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조에 대한 제사가 조상에 대한 제사로 바뀌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겠지만 이후 智證麻立干, 眞德王 등의 치세에도 신궁에 제사기록이 남아있는 등 御祀는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조상숭배사상은 고유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많은 변천을 겪어 오늘에 전하여 왔을 것이다. 그 중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유교의 조상숭배사상과 함께 불교의 윤회설, 내세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저승에 대한 관념이 兜率天 및 지옥과 극락이라는 개념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兜率天(TuSiTa-deva)은 須彌山 정상에 있으며 帝釋天 등 33천이 살고 있는  利天(TraayastriM$a)의 상공에 夜摩天, 樂變化天, 他化自在天과 함께 있으며 六欲天에 속한다. 그 위에 色界(rupa-dhaatu), 無色界(arupa-dhaatu)가 있다 했으며 이들 세계를 모두 합하면 三千大天世界라는 불교의 우주관이 형성된다.
兜率天은 그 중에서도 미륵보살(Maitreya)이 머물고 있는 천상의 정토를 말한다. 특히 미륵신앙은 삼국, 특히 백제와 신라에서 도솔천에 상생하고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회상에서 설법하는 자리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미륵하생 신앙으로 발전한 바 있다. 이러한 도솔천신앙이 토속적인 저승사상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상에서 설하는 바 도솔천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80화엄경에서 兜率은 그 용례가 광범위하되 제불보살과 범부대중에 이르기까지 왕생할 수 있는 곳으로 되어있다. 80화엄경에서 보면 부처님이 도솔천궁에서 歿하고 入胎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불 보살 역시 도솔천에서 강신하시며, 지옥중생 역시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불자야 내가 보살이었을 때 도솔천궁에 큰 광명을 발하니 이름이 光幢王이라 십불찰의 미진수세계를 비치니 그 세계중에 지옥중생이 이 빛을 만나는 자는 모든 괴로움에서 쉬며 십종의 청정안을 얻고 이비설신의도 이와 같아서 모두 환희가 생겨나며 용약칭경하며 그들의 명이 다하여 도솔천에 태어나나니 하늘 중에 북이 있으니 이름이 甚加愛樂이라

나아가 불교의 정토사상은 한국인의 저승사상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즉 조상이 사후에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것으로 믿어졌을 것이다. 40화엄경에는 受持讀誦하며 乃至書寫一四句偈의 공덕이 아미타극락왕생으로 인도한다고 했다. 이때 내영하는 성중이 아미타불 및 문수, 보현, 관음, 미륵보살 등이라 했다.

唯此願王은 不相捨離하야 於一切時에 引導其前하야 一刹那中에 卽得往生極樂世界하나니 到已에 卽見阿彌陀佛과 文殊師利菩薩과 普賢菩薩과 觀自在菩薩과 彌勒菩薩等이니

그러므로 아미타 극락왕생은 화엄경의 주요사상으로서 고려불화에 결정적으로 많은 아미타여래상을 남겼을 것이다. 아울러 아미타 삼존, 즉 阿彌陀, 勢至, 觀音 보살 혹은 阿彌陀, 地藏, 觀音보살로 바뀐 삼존도 및 아미타팔대보살도 등을 남겼을 것이다. 이러한 변모 역시 시대적인 신앙의 반영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경권의 포용력에 기인한다.
여기서 세지보살이 지장보살로 바뀌는 것은 신라시대의 신앙행태와 연관이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지장사상이 보고될 만큼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뿌리가 깊다. 지장경이 번역된 것은 北 (397-439)시대였으므로 삼국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훨씬 후대인 隋代(581-617)에 占察經이 번역된 시기와 엇비슷하게 진평왕(579-632)대의 圓光(555?-638?)에 의해서 占察敎法과 占察法會, 占察寶 등이 행해졌다고 했으므로  地藏經 역시 중국에서 번역된 후에 오래지 않아 신라에 수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地藏思想은 觀音思想과 함께 開元 4年 善無畏에 의해 地藏法 또는 地藏畵像法으로 密敎에 전입되었다고 했으므로 신라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연후 지장사상은 신라에서 보편적인 신앙으로 肉化한다.
신라 지장사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그 첫 번째는 金喬角 地藏菩薩 신앙이다. 宋高僧傳의 {唐池洲九華山化成寺地藏傳}의 주인공 金喬角 스님이 신라의 왕족이었으므로 신라인에게 친근하게 신봉될 수 있었을 것이며 이후 지장신앙, 나아가 정토신앙의 촉매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三國遺事에서 地藏信仰은 五臺山思想에서 잘 나타난다. 즉 南臺에 地藏菩薩이 현신한다 했으며, 오대산사상을 이끌었던 寶川은 유언에 地藏房을 남쪽에 두어 地藏菩薩像을 안치하고 붉은 바탕에 地藏 및 八大菩薩을 그리라 했다. 그리고 福田 五員을 두어 낮으로는 金剛般若, 밤으로는 占察禮懺을 읽게 하여 금강사라 부르라 했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또한 眞表律師 및 心地의 地藏感應은 신라시대 지장사상의 심도를 짐작케 해준다. 진표율사는 23세에 亡身懺의 끝에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을 고쳐주고 정계를 준다. 心地는 向堂禮拜 끝에 팔뚝과 이마에 피가 흐르자 지장보살이 매일 위문했으며 簡子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이후 고려 태조가 개국초 서경에 세웠다는 十代寺 중에 地藏寺 및 地藏方里가 보이며 地藏寺를 통한 佛事 등을 베푼 것으로 보아 고려에도 지장사상이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唐末의 僞經 佛說豫修十王生七經 등의 등장으로 시왕사상이 지장사상과 결합함에 따라  고려불화를 위시하여 조선의 地藏幀畵 또는 甘露幀畵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 외에도 布施나 造像, 寫經의 護法 공덕과 전통적인 孝 사상 및 조상숭배사상이 동일한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한국인들로 하여금 지장사상과 시왕사상을 포함한 정토사상을 더욱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나아가 高麗圖經 卷 17의 靖國安和寺條에 의하면 阿彌陀堂에 觀音과 地藏을 봉안하고 東 에는 祖師像을, 書 에는 地藏像을 그렸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러므로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지장사상이 지옥사상이라기보다는 극락정토사상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장보살이 아미타불의 권속으로서 정토사상을 대변한다고 보면 그 소의경전은 역시 화엄경이라 할 수 있다. 즉 普賢行願品에서 죽음에 이르러 미타불을 면대하련다는 화엄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지장사상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아 한국의 불교는 토속신앙의 큰 흐름인 태양신 숭배와 조상숭배의 상당부분을 공유하는 신앙이며 그 중에서도 화엄경의 도솔천왕생사상 및 보현행원품의 미타정토 왕생사상과 긴밀한 유대를 맺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배경에서 고려불화의 경우도 그 조성의 공덕이 경권신앙과 비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2. 토속신앙과 화엄세계

고려불화에서는 엄정하기 짝이 없는 도상 중에서도 마차 숨은 그림찾기처럼 삼족오, 달토끼(월토), 봉황, 용, 십장생 등이 문양의 형태로 그려지는데 이 도상들은 불교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토속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6 松尾寺 阿彌陀如來圖 寶冠의 三足烏
76 盧山寺 水月觀音圖의 月兎
47 大倉集古館(至大3年=忠宣王2=1310)의 壽石과 不老草
74 長樂寺 水月觀音圖의 壽石과 不老草
121 聖澤院 摩利支天圖의 龍

상고시대부터 전해온 토속신앙에서 보면 삼족오는 태양, 달토끼는 달을 상징한다. 봉황과 龍은 靈獸瑞鳥라 하여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관이 있는 상징동물로 생각되기도 한다. 민화에서 주로 그려지는 십장생은 日月雲水 山石松竹 鶴鹿龜芝의 열 두가지 長生物 중에서 열 가지를 골라 그린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태양의 상징은 토속신앙이 불교에서 찾아낸 공감대이기도 하다.
태양숭배는 인류의 오랜 신앙이었다. 상고시대 한국에서 볼 때, 고구려의 東盟이나 濊의 舞天 등은 하늘과 태양에 대한 제사였다. {三國志』[東夷傳]에는 부여·고구려·예·삼한 등에서 주로 10월에 행한 제천의례가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殷正月 혹은 臘月, 즉 시월에 제천대회를 열어 날마다 음주가무하는데 이름을 영고라 한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고 했으며, 高句麗는 시월에 제천하는 국중의 대회가 있으니 이름을 東盟이라 한다(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고 했다. 濊는 보통 시월을 제천절로 하는데 밤낮으로 가무음주하며 이름을 舞天이라 한다(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고 했다. 또 삼한에는 귀신을 섬기며 나라의 읍단위마다 각각 한사람을 세워 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했는데 이름을 天君이라 했다(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하였다.
이렇게 고대인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은 하늘이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여에서는 천재지변이 있으면 옥살이를 하는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出征하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쳤다고 했다. 하늘의 뜻을 묻는 의식이 있었으니 軍事가 있을 때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를 죽여 발굽이 달라붙으면 길하고 풀어지면 흉하다 했던 것이다.
하늘과 태양에 대한 제사는 고대의 많은 나라에서 봉행되었던 습속이었다. 고대인은 하늘과 태양을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즉 연장자나 지배자에게 하듯 공경의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인격적인 보답이 있으리라는 사상이 고대인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고시대의 하늘 제사는 고려로 계승되었다.
고려의 왕들은 천재지변이나 일식 등에 죄수를 풀어주었다. 억울한 죄수의 원한이 하늘을 노하게 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사 세가에 나오는 죄수에 대한 항목은 모두 475회이며 그 중에서 가뭄이나 낙뢰 등과 관련된 몇 가지 예를 들면, 성종 신묘 10년(991) 가을 7월에 가뭄이 계속되므로 죄수들을 석방하고 정전에서 옮겨 앉으며 아침 저녁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있다.  목종 병오 9년(1006) 6월 무술일에 天成殿의 대마루 장식물에 낙뢰하였다. 왕이 걱정되고 두려워서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고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현종 병진 7년(1016) 가을 7월 경신일에는 누리의 피해가 있어 죄수를 출옥시키고 있다. 이러한 관례는 공양왕 임신 4년(1392) 가을 7월 무자일 죄수석방에 이르기까지 줄곧 보이고 있으므로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관행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도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고려왕의 천제, 즉 圓丘親祠 혹은 기우제(雩祀)는 태묘에 체제, 합제, 시제를 지내는 것과 왕이 '先農壇에 제사지내고 籍田을 경작한 후(享先農耕籍親幸後)'에 대사를 행하는 의식과 같다고 했으니 얼마만큼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하늘제사는 토속신앙에서 天地神明과 日月星辰에 대한 제사로 나타난다. 연원을 좇아 다시 6세기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輯安에 있는 벽화고분 중에서 오회분 5호묘와 오회분 4호묘에서 해를 이고 있는 해신과 달을 이고 있는 달신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속에 있는 三足烏, 달 속에 있는 달두꺼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와 달의 상징도상은 고구려 뿐 아니라 상고시대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 태양신 및 태음신 숭배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참고도판: 輯安 오회분 오호묘와 오회분 4호묘 해신과 달신
 
이렇게 분명한 상징과 도상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문헌상으로 태양신화 혹은 태양신의 계보를 강조하는 신화나 설화는 많다.
고구려의 주몽은 닷되들이 만한 큰 알에서 나왔다고 했다(生一卵, 大如五升許).
신라의 시조인 朴赫居世는 박 모양의 알에서 나왔으며(只有大卵, 剖之, 有 兒出焉), 昔脫解는 다파나국에서 알로 태어났다(有娠七年乃生大卵)고 했다. 그런데 隋書에 의하면 주몽은 햇빛에 감응하여 알로 태어났다고 했다. 말하자면 태양, 태양신, 혹은 천제와 관계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追兵에 쫓기는 주몽이 스스로 자신을 天帝子 혹은 日子요, 河伯의 외손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태양신이나 혹은 천제는 후손에게 영험을 베풀 줄도 아는 인격신이었다. 이를테면 군사에게 쫓기던 주몽에게 魚鼈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느게 해주었다는 삼국사기의 설화에서 천제는 자손에 대한 인간적인 유대와 생명의 위험이라는 인간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인격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불교전래 이전의 고대 한국인에게 스스로 하늘민족이거나 태양신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을 불러일으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한국인이 불교에서 토속적인 태양신이나 천제사상을 찾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배경에서 러시아의 니키티나 교수는 阿彌陀佛이나 毘盧遮那佛 등은 고대의 한국인들에게 인간세계에 빛을 주는 일종의 태양신으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즉 대승경전에서 비로자나불(vairocana)은 光明遍照, 밀교에서는 大日如來(maha-vairocana)라 번역하기 때문이다. 둘 다 태양 혹은 태양신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兜率天宮은 마치 태양의 세계라 할만큼 백만억의 광명이 온갖 모습으로 나투는 광명천지로 묘사된다. 
나아가 비로자나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로자나'에 '비'라는 접두사를 붙인 것으로서 빛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며 바로 태양, 태양신을 의미한다고 정의된다.
바이로차나는 태양이 광명을 널리 비춘다는 점에서 태양 자체의 이름 혹은 이름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원래 빛난다는 것은 불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달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바이로차나는 우파니샤드와 중동의 신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즉 바이로차나가 불교고유의 것이 아니라 불교의 입장에서 외래적인 개념이라면 그 자체에 다른 토속신앙에서의 태양신이나 천제라는 신격 역시 불교에 쉽게 수용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나아가 吉村怜은 불상의 변화에 주목하여 화엄경의 성립과 함께 불교가 서북인도 및 天山南路로 파급되는 사이에 석가불의 불신관이 발달하여 우주의 주재자로서의 석가모니불이라는 관념이 盧舍那佛像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불교가 파급되는 지역의 신앙이나 사상이 불상과 나아가 불신관의 전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토속신앙의 태양상징이 고려불화에 그려질 수 있었던 배경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大方廣佛華嚴經은 이러한 토속적인 태양신앙을 융섭할 수 있는 충분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비로자나불(vairocana)과 함께 노사나불(rosana) 역시 태양과 연관지어 생각될 수 있다. 여기서 대방광(mahaavaipulye)이란 원력과 자비, 신통력과 위신력이 크고 반듯하고 넓다는 말이다. 모든 법계 중에서 청정법륜을 굴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모두 태양과 같은 위의를 연상케 하는 해설들이다.
 그런데 비로자나불에 대한 雜阿含經(Sammyuktaagama)의 설명을 보면, 화엄경 이전에도 비로자나불은 태양신과 유사하게 존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諸月天子, 즉 月天子들이 羅喉羅와 阿修羅王을 두려워하자 세존이 비로자나의 광명에 의해 라후라와 아수라가 도망갈 것이라고 게송으로 답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모든 아득한 어둠을 깨뜨리고 광명을 허공에 비치나니 지금의 비로자나란 청정한 광명이 빛나는 것을 말한다(破壞諸闇冥 光明照虛空 今毘盧遮那 淸淨光明顯)'라 하여 태양을 연상케 하는 묘사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배경에서 화엄경 변상도 등을 비롯한 존상도에는 문수 보현 및 권속들이 마치 태양을 에워싸고 있는 햇빛이나 코로나처럼 비로자나불을 圍繞하는 형상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도상들에서 특징적인 것으로는 전통적으로 태양의 상징이라 여겨졌던 卍字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시 고려불화에 토속적 상징인 三足烏와 卍字가 자연스럽게 그려질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卍字는 토속적 혹은 전통적 상징이자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 華嚴經變相圖; 麻本彩色, 165.0×58,0cm, William Sturgis Bigelow Collection Courtesy,  Museum of Fine Art, Boston, U.S.A.

쾰른박물관의 毘盧遮那三尊圖에는 비로자나불의 가슴에 左旋의 卍자가 그려져 있다.

2 毘盧舍那三尊圖; Museum fur Ostasiatische Kunst, Kohln, Germany. 絹本彩色. 123.0×82.0cm, Museum fur Ostasiatische Kunst, Kohln, Germany.Inv. no. A 09,59. Photograph: Rheinisches Bildarchiv KohIn.

그리고 不動院의 비로자나불을 X 선 사진으로 보면 바탕에 사방연속무늬처럼 卍자가 그려져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것은 마치 태양광선이 사방 팔방으로 방사하는 효과를 연상케 한다.

3 毘盧舍那佛圖;不動院 : 絹本彩色, 175.9x87.1cm, 不動院 : 日本 廣島市

이 放光의 구절 역시 華嚴經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것은 如來의 한 毛孔에 不思議光을 발하시어 모든 群生을 두루 비치어 그 煩惱를 滅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卍(svastika)자는 慧苑의 {華嚴音義}에 의하면 則天武后 치하의 長壽 2년(693)에 한자에 편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기존에 널리 알려져 있던 문자를 한자에 편입했다는 말이 된다. 이 卍자는 吉祥萬德이 모여든다는 의미도 있으려니와 武周新字에서처럼 태양을 연상케하는 상형문자의 표기가 보이는 점 등으로 미루어 상고시대부터 태양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이 卍자는 불교에서 불 보살의 대인상으로 나타날 때는 태양이거나 태양과 같은 신격으로 동일시되었다는 많은 전거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적극적으로 만자의 의미를 해명하려 했던 화엄의 입장에서도 卍이라는 도형은 비로자나의 연화장세계 혹은 해인과 같은 깨달음의 현현 등으로 비유되고 있다.
80화엄경에서 華藏世界品 중의 二十層 세계에는 衆妙光明燈, 妙梵音, 寶色莊嚴, 寶莊嚴藏세계가 卍字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각기 해당되는 佛號가 있다. 그런데 이 세계와 불호는 각각 광명이나 빛에 해당되는 구절이 보인다. 즉 衆妙光明燈은 佛號가 不可 伏力普照幢인데 光明이라는 이름이 있다. 妙梵音은 佛號가 廣大目如空中淨月이며 空中淨月이라 하여 빛을 암시하며, 寶色莊嚴은 佛號가 逈照法界光明智인데 光明이라는 말이 들어간다. 그리고 寶莊嚴藏은 佛號가 大變化光明網이며 역시 光明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卍자가 비록 전통신앙에서 태양의 상징과 중복되더라도 화엄에서는 나름대로의 교리와 해석으로 비로자나의 重重無盡 華藏世界를 표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80화엄의 如來十身相海品은 卍자를 포함하여 千輻輪文에 대한 충분한 도상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千輻輪文은 부처의 전법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발바닥, 손바닥, 치아에 나타난다고 되어있다. 발바닥의 무늬는 遊行說法을, 손바닥의 무늬는 가리킴을, 치아의 무늬는 설법이 터져 나옴을 상징한다. 
왼발가락 사이에는 現一切佛海雲이라는 대인상이 있어 摩尼寶華香焰燈 一切寶輪으로 장엄하고 늘 寶海淸淨光明을 나투며 허공에 충만하여 시방일체세계에 보급하는데 그 중에 일체제불과 보살의 圓滿音聲卍字等相 등의 상이 나타나 모든 중생이 무량한 이익을 얻으니 이를 89대인상이라 한다 했다. 그리고 오른쪽 발뒤꿈치에는 照耀雲이라는 90번째 대인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80화엄에는 卍자가 16번 검색된다.
먼저 십회향품에는 頂 布施, 齒牙布施, 心臟布施, 手足指布施가 만자와의 연관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80華嚴 如來十身相海品에서 如來胸의 十一相을 보면

여래의 가슴에 대인상이 있어 卍자의 모양과 같으니 이름이 길상해운이라.  마니보화로 장엄하고 일체의 보배색으로 갖가지 光焰을 발하여 법계를 두루 충만하게 하며 다시 묘음을 내어 법해를 널리 펼치니 이를 53번째 대인상이라 하니라

고 했다.
또 입법계품에는 만자 중에서 수백천억의 아수라왕이 가슴의 만자에서 나온다 했다. 여기서 卍자가 光焰을 발하여 법계를 두루 충만하게 한다 했으므로 역시 빛을 발하는 존재, 이를테면 태양이거나 그러한 존재의 덕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80화엄에서만 예를 들더라도 卍자는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에만 쓰인 것이 아니며 불보살을 위시한 아수라, 선견비구 등에 두루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菩薩十種心...卍字相金剛堅固勝藏莊嚴心 (38. 離世間品)
菩薩摩訶薩이... 於卍字金剛莊嚴心藏中에 放大光明 (38. 離世間品)
從胸前卍字中하야 出無數百千億阿修羅王하니 ( 7. 海幢比丘/ 第六 正心住善知識)
善見比丘...胸標卍字하고-(12. 善見比丘 / 第一 歡喜行善知識)

이러한 예로 볼 때 卍字는 비로자나나 아미타불의 고유한 대인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광명의 속성이 강조된 경우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만자가 태양과 광명변조의 위신력의 상징으로서 두루 쓰이다가 점차 비로자나 혹은 아미타불이라는 대표성을 지닌 부처에게 집중되었거나 잡아함경 등에서 법신 비로자나의 속성으로 묘사되었다가 불 보살의 보편적인 속성으로 전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화엄의 포용적인 사상은 의상의 해인도에서도 그 관대한 해석의 예를 보여준다. 즉 신라의 義湘은 華嚴一乘法界圖, 즉 海印圖에서 법성을 증득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으니 구경청정해서 海印이라 이름 붙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찾아가는 圖印의 굴곡과 방향이 右旋의 卍자와 같다고 전해주 교수는 주장한다.
이렇게 불교교리에 따른 상징과 화엄의 사상이 충실하게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토속신앙과 공유되는 태양의 상징 및 달, 십장생 등의 도상이 전통문양의 형식으로 고려불화에 남아 있다는 것은 고려불화가 단순한 불교교리의 도해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화엄사상과 아울러 한국의 전통적 상징을 담고 있는 훌륭한 그릇임을 시사하고 있다.

III. 彌陀淨土畵와 화엄사상

다시 {高麗時代의 佛畵}에 소개된 바 현재 전해지는 고려불화의 분포를 보면, 압도적인 주제는 아미타불 및 미타정토에 관한 도상이었다. 그것은 고려인들의 정토에 대한 갈망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淨土(sukhaavatii)의 개념을 보면, 정토란 불 보살이 머무는 깨달음의 淸淨光明覺 세계를 일컫는다. 대승불교는 경전과 모든 불 보살의 정토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대승에서 보는 정토는 화엄경의 蓮華藏세계, 법화경의 靈山會上, 大乘密嚴經의 密嚴淨土 등과 함께 毘盧遮那佛의 靈山淨土, 彌勒佛의 龍華世界, 阿彌陀佛의 極樂淨土, 藥師如來의 藥師淨土, 阿 佛의 阿 佛國土 및 彌勒菩薩의 兜率淨土, 觀音菩薩의 觀音淨土 등이 망라된다. 그러나 淨土라 하면 일반적으로 阿彌陀佛의 서방 極樂淨土를 일컫는 경향이다. 그만큼 아미타 정토에 대한 신앙의 저변이 넓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아미타신앙은 인도의 비슈누(vishnu), 브라흐마(brahma), 시바(siva)를 중심으로 하는 정토사상이 般舟三昧經(prayyutpannasamaadhi-suutra), 無量壽經(amitaayus-suutra) 등의 대승경전을 거치면서 왕생사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불멸 후 석존을 대신할 부처로써 十方遍滿佛인 毘盧遮那佛과 함께 등장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발전과정을 보면, 먼저 인도에서 龍樹(Naagaarjuna)의 阿彌陀本願, 稱名, 念佛思想이 無着(asaNga)의 攝大乘論, 世親(Vasbhandhu)의 往生論 등을 거치면서 중국으로 소개된다. 중국에서는 慧遠류, 道綽 善導류, 慈愍류의 삼 부류를 지나면서 정토사상이 선양된다. 그것이 신라와 고려로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 정토사상은 염불만 하면 불보살이 극락왕생을 도와준다는 他力門이라는 측면이 보다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토사상은 易行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행문에 배대되는 개념인 難行門은 수도를 통하여 열반에 이른다는 입장을 일컫는다. 이러한 상대적인 입장차이 때문에 정토사상은 불교의 이상이 변질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고려불화에 그려진 정토화는 결코 쉬운 내용도 아니며 역시 쉽게 얻어질 수 있는 대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즉 고려불화의 정토화는 도해하기 쉬운 觀無量壽經이 아니라 無量壽經 및 阿彌陀經을 중심으로 하는 阿彌陀如來圖가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 普賢行願品과 阿彌陀如來圖

일반적으로 淨土畵의 所依經典은 淨土三部經, 즉 觀無量壽經, 無量壽經 및 阿彌陀經을 들 수 있다. 관무량수경은 頻毘娑羅王(혹은 頻婆娑羅王) 일가의 설화를 중심으로 한 단순한 구성과 16觀 등의 체계화한 정토를 도식화할 수 있어 이해되기 쉬운 만큼 下根機 정토계에 속한다고 본다. 도상으로는 觀經變相圖의 형태로 그려진다.
반면 무량수경 및 아미타경을 도식화하려 할 때는 아미타불, 아미타삼존도, 그리고 아미타내영도 등을 그리면서 정토사상을 도식화, 표상화하기가 어려우려니와 來迎 혹은 授記思想 등을 차별화하여 도상화한다는 것 역시 쉽지 않으므로 上根機 정토계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데 고려불화에서는 아미타여래도와 아미타삼존도가 압도적으로 많이 그려졌다. 즉 무량수경 혹은 아미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상근기 정토계의 불화가 주종을 이루는 것이다. {高麗時代의 佛畵}에 수록된 133점의 불화에서 보면 아미타계열의 도상이 47점인데 비해 관경도는 5점에 불과하다. 즉 상근기 정토화가 압도적인 것이다. 나아가 관음과 지장을 아미타삼존으로 확대해석하게 되면 아미타관계 도상은 103점이 되어 수록된 고려불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불화 중의 하나인 아미타삼존도를 보면

44 阿彌陀三尊圖 絹本彩色, 110.0x51.0cm, 湖巖美術館 · 韓國 龍仁, 國寶 218號

阿彌陀佛과 觀音菩薩, 地藏菩薩이 그려져 있다. 원래 아미타삼존은 阿彌陀佛과 觀音菩薩, 勢至菩薩이었으나 勢至菩薩이 地藏菩薩로 자리바꿈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그 교체가능성이 충분히 시사된 바 있지만, 고려에서는 몽고의 병란에 시달리던 고려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지장보살이 죽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해주고 극락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신념이 반영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려불화에서 상근기 정토계라고 하는 무량수경이 중심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고려의 불교는 어려운 교학보다는 밀교 계통의 의례가 더 성행했으며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종이 보편화된 시기였다. 그렇다면 유독 고려불화에서 상근기 정토계의 아미타불 도상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그것은 고려의 보편적인 공감대라기보다 전 시대인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불교, 그리고 화엄의 전통을 답습했으리라는 가정도 세울 만 하다. 그러한 가정의 배경에는 신라에서 해동 화엄의 초조라 일컬어지는 의상이 화엄을 바탕으로 하되 서민불교적인 미타신앙을 고취했던 사실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 文武王 16년 2월에 의상은 왕명으로 華嚴宗刹인 浮石寺를 창건했다. 그런데 무량수전을 主佛殿으로 삼고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셨다. 나아가 무량수전은 남향인데도 내부의 불상은 서쪽에서 동향하고 있어 아미타여래의 서방정토 극락세계 내영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의상은 화엄사상에 그 교학적 근거를 두면서도 신앙은 극락정토에 두어 '등을 서쪽으로 돌리지 않았다(不背西方)' 했으니, 정토신행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짐작할 만 하다. 나아가 의상이 창건한 동해 낙산의 관음도량 역시 정토사상의 발현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토사상은 의상의 사상과 행적에서 보듯 신라화엄의 초창기부터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토사상이 고취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화엄이라는 엄정한 교학과 교리에 바탕함으로써 미타정토는 상근기 정토인을 위한 정토사상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토사상은 화엄사상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고려불화에서 정토계로 분류되는 도상들은 普賢行願品과 普賢菩薩行願贊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그 연관성을 보여준다. 특히 고려불화 중에는 아미타여래를 그린 후에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서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아미타불도의 배경에 화엄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島津家 舊藏本으로 부르는 阿彌陀如來圖에는 蓮花生과 阿彌陀淨土 往生의 발원이 명기되어있다.

26 阿彌陀如來圖 至元23年(忠烈王 12. 1286), 絹本彩色, 203.5x105.Icm, 日本 島津家 舊藏

먼저, 이 아미타여래도는 고려불화의 정토사상과 화엄사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도상에서 아미타여래는 한 장의 연잎 위에 서있으며 발 앞에는 연화가 피어있고 몇 가닥 먹선으로 蓮池의 물결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미타정토의 蓮池임을 암시한다. 172cm의 등신대로 그려진 당당한 체구에 오른 손은 앞으로 내밀고 왼손은 구부리고 있다. 이 포즈는 발 밑의 연대에 왕생자를 태우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라고 해석된다. 육계 및 가슴부분에 卍字가 그려져 있으며 손바닥에는 千輻輪文이 있어 여래의 대인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연화생과 발원의 내용이 정토삼부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普賢行願은 화엄경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나오는 '理와 事가 명연하여 分別이 없으니 十佛과 普賢의 大人 경계이다(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등의 게송은 화엄에서 보현의 위치가 매우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40화엄경의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의 핵심사상으로서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설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문제로 삼는 보현행원품의 사상은 보현보살의 十種廣大行願과 그 말미에 있는 서원이다.
먼저 10대 행원이란 1. 禮敬諸佛(모든 부처에게 예를 갖추어 공경함) 2. 稱讚如來(여래의 공덕을 칭송함) 3, 廣修供養(모든 부처에게 널리 닦으며 공양함) 4 懺罪業障(죄업과 업장을 모든 부처 앞에서 참회함) 5. 隨喜功德(六趣와 四生의 공덕을 함께 기꺼이 기뻐함) 6. 請轉法輪(모든 부처에게 설법을 구함) 7. 請佛住世(모든 부처가 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청함) 8, 常隨佛學(언제나 모든 불법을 따름) 9. 恒順衆生(항상 중생의 根機에 따라 공양함) 10. 普皆廻向(온갖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줌)을 말한다. 
80화엄 및 40화엄에서는 명이 다하는 최후 찰나에 십종행원의 결과로 "일찰라중에 즉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나니, 극락에 도달하면 즉시 아미타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자재보살, 미륵보살 등을 친견하게 되느니...(一刹那中에 卽得往生極樂世界하나니 到已에 卽見阿彌陀佛과 文殊師利菩薩과 普賢菩薩과 觀自在菩薩과 彌勒菩薩等이니 ...)" 라 하여 아미타 성중의 내영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 上求菩堤와 下化衆生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이르되

원하노니 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일체의 장애를 남김없이 떨어내고 저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즉시 안락찰에 왕생을 얻고자 하노라.
내가 이미 안락찰에 왕생하였으면 이 큰 서원이 모두 원만하고 남김없이 성취되어 나투도록 해주시고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고 즐겁게 하리로다.
(願我臨欲命終時에 盡除一切諸障 하고 面見彼佛阿彌陀하야 卽得往生安樂刹이로다
我旣往生彼國已에 現前成就此大願하고 一切圓滿盡無餘하야 利樂一切衆生界로다

라고 했다. 여기서 上求菩堤란 安樂刹에 왕생한다는 서원이며 下化衆生이란 중생계를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井手誠之輔는 島津家 舊藏本의 아미타여래도에 바로 이 찬문이 서사되어 있으므로 보현행원품의 사상이 정토계 아미타불화의 조성동기가 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보살의 행원에는 上求菩提와 함께 下化衆生의 구체적인 실천이 따라야할 것이며 그것이 아미타불화의 조성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아미타여래의 발밑에 피어 있는 연꽃 역시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극락정토와 연꽃 화생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보현행원품에서 ' 저 부처님들이 모두 모여 다 청정하듯이 나도 연꽃 속에서 몸을 받을 때에 직접 여래의 무량광이 내 앞에 나타남을 보고 내게 깨달음의 수기를 주도록 하리라'라는 대목의 도상화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량수불, 즉 아미타여래의 세계에 연화생한다는 사상 역시 화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불화의 화면 아래의 좌우에는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가 고증했다는 명문이 있다. 그것은 충렬왕과 원성공주가 고난에 처하지 않고, 임종시에는 아미타여래를 친견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명문에는 보현행원품의 게송이 발원문의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발원자는 嬖行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바 있는 廉承益이다. 명문에는 奉翊大夫左常侍廉□□으로 되어 있다. 폐행은 미천한 자로서 귀인의 총애를 받는 간사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염승익은 비록 뇌물이나 청탁으로 매관매직, 권력을 빙자하여 정적을 숙청하거나, 田槽를 가로채기도 했고, 왕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가처녀를 토색하기도 했지만, 信佛의 축문을 외면서 손바닥을 뚫어 새끼를 꿰는 고행을 했다거나 왕의 사냥취미를 불교교리로 설득하여 억제하거나, 손바닥 위에 숯불을 올려놓고 분향 염불하는 등 깊은 불심을 짐작케 하는 사례도 동시에 실려있다. 특히 여기서 손바닥을 뚫어 새끼로 꿰었다는 구절은 신라시대에 念佛西昇했다는 旭面婢의 信行과 같은 것으로 보아 신라 정토신앙의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성공주는 통념적으로 불교를 맹신하여 불사에 재정을 낭비했다는 기록과 다른 행적을 보여준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안하무인이면서 질투가 심하고 욕심이 많았다. 이를테면 왕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구타하기도 하고, 흥왕사의 황금탑을 사사로이 녹여 쓰려고 하다가 왕의 병환기도에 부득이 돌려주기도 했으며 여승에게서 세모시를 잘짜는 여종을 뺏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염승익이 표면적으로는 왕과 왕비의 극락왕생을 위한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서원과 행원의 방편으로 현재 島津家에 소장된 阿彌陀如來圖를 조성했다는 의미로 명문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행원이 바로 도상에 남겨진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화엄의 보현행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염승익의 신행은 정토사상에 바탕한 화엄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荻原寺 아미타여래도는 아미타정토보다는 화엄의 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여래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고 井手誠之輔는 설명한다. 아마도 그러한 추측은 島津家 舊藏本보다 동세가 크고 색채가 발랄하므로 보다 적극적으로 왕생자를 이끄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림에서만 본다면 荻原寺 아미타여래도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로 인도한다는 도상적 단서를 찾기 어렵다. 그것이 고려불화의 특징이기도 하려니와 아미타불 혹은 아미타정토를 상징하는 蓮池 혹은 寶樓 殿閣 등을 대신하여 아미타불의 내영 부분만 강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27 阿彌陀如來圖 絹本彩色, 110.8×50.4cm, 萩原寺 · 日本 善川縣

하여튼 井手誠之輔의 화엄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여래라는 착안은 매우 설득적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에 의하여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보현행원을 중시했던 화엄학의 흐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均如(923-973)는 보현행원을 중시하여 {普賢十願歌}라는 향가를 지어 화엄교학의 대중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균여의 普賢十願歌 11수는 文宗 29년(1075)에 赫連挺 撰의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과 高宗 38年(1251)에 개판된 {釋華嚴敎文記圓通抄}에도 실려 있다고 했으니, 島津家 舊藏本이 조성되었던 당시까지도 불리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본다면 균여 등의 영향력이 보현행원찬이라는 화엄의 이름으로 고려불화 조성의 한 동기를 마련해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普賢菩薩行願贊과 八大菩薩圖

普賢行願信仰은 島津家 舊藏本 阿彌陀如來圖를 비롯한 아미타여래도의 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阿彌陀八大菩薩圖에서 팔대보살의 상호나 지물의 식별이 쉽지 않은 점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文殊, 普賢, 觀音, 勢至, 彌勒, 地藏, 虛空藏, 除蓋藏 보살이 등장하며 혹은 세지보살 대신 金剛手菩薩이 그려지기도 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팔대보살 중에서 중심은 역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하되 관음 세지보살이 협시로 등장하는 아미타삼존이다. 정토삼부경에서 아미타삼존에 대한 내용은 무량수경 권 하에 관음 세지보살로 설명되고 있다. 즉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보살들 가운데 위신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비치는 가장 존귀한 두 보살이 있느니라 하셨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되 그 명호가 어떠하십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한 분은 관세음이라 하고 또 한 분은 대세지라 하며 이 국토에서 보살행을 닦다가 명이 다하여 저 불국에서 몸이 바뀌어 태어났느니라

고 했다. 협시의 위치에 대해서 觀無量壽經의 像觀에는 "관세음보살의 상이 왼쪽 연꽃 위에 앉아있고, 대세지보살의 상이 오른쪽 연꽃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여기서 像觀이란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수행하는 방편을 일컫는다. 

8 阿彌陀三尊圖 至大2年(忠宣王 元年, 1309) 絹本彩色, 各 147.0x61.5cm, 上衫神社 日本 山形縣 米澤市

그런데 아미타경에는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을 설하는 것을 듣고 일심불란하면 임종시 염불공덕으로 극락왕생한다는 대목이 있다. 즉

미타불의 명호를 집지하여 만약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라도 일심으로 산란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목숨이 다할 때 아미타불과 모든 성중이 그 앞에 나타날 것이며 이 사람이 임종시 마음이 전도되지 않으면 즉시 아미타극락국토에 왕생함을 얻으리라

했다.
그 아미타 성중에 대한 설명은 관무량수경에서 볼 수 있다. 역시 아미타삼존인 아미타, 관음, 세지보살이 중심이 된다.
觀無量壽經의 上輩觀에서는 "上品上生者에게는 관음, 세지, 화신불, 비구 등 성문대중, 천인들이 칠보궁전과 더불어 나투며 관음과 세지보살은 금강대를 가지고 수행자앞에 이르고, 아미타불은 광명을 발하시어 그 상품상생자의 몸을 비추시며 여러 보살들과 함께 손을 내밀어 영접하시느라" 하여 觀音 勢至菩薩을 미타성중에서 중요하게 거론하고 있다.
이것은 상품상생자의 경우이거니와 나머지 8품 역시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미타성중의 영접양상이 약간씩 다른 바 있어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표를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阿彌陀佛의 光明 #2: 阿彌陀, 觀音, 勢至의 化佛 #3: 꽃속의 化佛, 化菩薩

이렇게 정토삼부경의 내용을 종합하면 아미타불의 염불공덕으로 왕생자가 임종을 맞을 때면 아미타성중, 즉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의 삼존을 위시한 팔대보살과 성중이 내영하여 연화생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미타 팔대 보살도 역시 보현행원품과 관련이 깊다. 그것은 아미타 팔대보살도의 소의경전이 八大菩薩曼茶羅經인데 팔대보살만다라경은 보현행원품의 별역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 팔대보살이란 阿彌陀如來를 위시하여 文殊 普賢, 觀音 勢至, 彌勒 地藏, 그리고 虛空藏, 金剛藏, 除障碍菩薩을 일컫는다. 所依經典은 不空이 번역한 {八大菩薩曼茶羅經}으로 알려져 있다. 
八大菩薩曼茶羅經에는 여래가 密言을 설한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觀自在菩薩, 慈氏菩薩, 虛空藏菩薩, 普賢菩薩, 金剛手菩薩, 曼殊室利菩薩, 除蓋障菩薩, 地藏菩薩이 나온다. 여기서 阿彌陀如來는 觀自在菩薩의 頭冠 중에 있다. 그렇다면 普賢, 地藏, 除障碍 및 虛空藏보살은 그대로이고 文殊菩薩은 曼殊室利菩薩, 觀音菩薩은 觀自在菩薩, 彌勒菩薩은 慈氏菩薩, 金剛藏菩薩은 金剛手菩薩로 배대되고 있으므로 八大菩薩曼茶羅經의 보살은 阿彌陀八大菩薩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八大菩薩曼茶羅經에서 인용한 八大菩薩贊은 원래 普賢菩薩行願贊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普賢菩薩行願贊은 七言對句로 되어 있는데 말미에 실린 五言對句가 八大菩薩贊이며 出八大菩薩曼茶羅經末이라는 발문에 이어 10개의 게송이 있고 그 내용 중에 정례하는 보살의 이름이 蓮花手, 慈氏尊, 佛心子, 普賢, 金剛手, 妙吉祥, 除蓋藏, 地藏이다.
그러므로 {八大菩薩曼茶羅經}에서 열거하는 文殊=妙吉祥, 普賢=普賢, 觀音=蓮花手, 彌勒=慈氏尊, 地藏=地藏, 그리고 虛空藏=佛心子, 金剛藏=金剛手, 除障碍=除蓋障菩薩과 배대될 수 있다. 즉 八大菩薩曼茶羅經의 八大菩薩이 普賢行願贊에서 근거하므로 阿彌陀八大菩薩圖의 팔대보살 역시 보현행원찬에 근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현보살행원찬 1권은 40화엄의 40권 후반에 실린 普賢行願品 全 62偈의 別譯으로 알려져 있다. 별역이란 내용이 다른 번역이라는 말이 된다. 원래는 단행본으로 범본, 티벳본, 한역본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런데 60화엄을 직접 번역한 佛陀跋陀羅가 60화엄에서 이 게송만을 분리해 文殊師利發願經 1권을 역출했다. 따라서 60화엄에는 보현행원찬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實叉難陀가 번역한 80화엄에도 보현행원찬은 없다. 오직 범본이나 티벳 번역본에서는 입법계품의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井手誠之輔가 주장하는대로 阿彌陀八大菩薩에서 역추적해 들어가면 八大菩薩曼茶羅經이 나오고 八大菩薩曼茶羅經은 普賢菩薩行願贊에 실려 있으며 다시 普賢菩薩行願贊은 普賢行願品으로 소급하니까 아미타팔대보살은 화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普賢菩薩行願贊 자체가 불화로 그려진 것은 현재로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普賢行願品 寫經 중에는 陀羅尼(dharani)의 형태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충숙왕 3년(1334)에 書寫된 湖林美術館 소장의 紺紙銀泥普賢行願品 1권 및 京都國立博物館 소장의 白紙金泥普賢行願品에는 般若三藏이 번역한 普賢行願品을 寫經한 후에 끝 부분에 {速疾滿普賢行願陀羅尼}라 덧붙이고 陀羅尼를 적었으므로 不空이 번역한 {普賢菩薩行願贊} 1권을 원전으로 했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미타팔대보살도 역시 아미타여래도와 마찬가지로 정토사상을 표방하지만 그 배경에는 화엄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내용을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불화 130여점 중에서 여기까지의 논의에서 밝혀진 바 화엄사상과 관련이 있는 도상은 阿彌陀圖 47점, 觀經圖 5점, 阿彌陀八大菩薩圖 58점, 화엄관계도상 6점으로 모두 116점이 된다. 소의경전과 도상으로 분석한 이 자료만으로도 거의 모든 고려불화가 화엄사상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아미타신앙은 그러므로 화엄과의 연관에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
아미타신앙은 신라에서 此土가 淨土라는 사상, 나아가서는 新羅佛國土의 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역시 삼국유사를 보면, 먼저 아미타신앙을 반영하는 기사로서 南山 避里村의 念佛師의 彌陀念佛소리는 360坊 17萬戶에 낭랑히 들렸다 했다(卷第五 避隱第八: 念佛師). 月明은 亡妹를 위해 향가를 지어 彌陀刹에서 만날 때까지 道 닦아 기다리고자 한다고 했다(卷第五 感通 第七: 月明師兜率歌).
그러므로 신라에 있어서 미타신앙은 매우 보편적임을 알 수 있는데, 金仁問의 석방을 기원해 세운 仁容寺의 觀音道場은 인문이 귀국하는 해상에서 죽자 미타도량으로 고쳐졌다(卷第二 紀異第二: 文虎王法敏). 그리고 彌陀佛 火光後記에는 金志全이 甘山寺를 세우고 石彌陀 1軀를 봉안했다(卷第三 塔像第四: 南月山). 또 桂花王后가 昭成大王이 崩御함에 敏藏寺에 彌陀像 및 神衆像을 봉안했다 민장사는 미타불의 창사연기가 서린 곳으로 믿어졌다 (卷第三 塔像第四:  藏寺彌 殿). 그리고 道成 의 僧 成梵이 太平興國七年壬午에 萬日彌陀道場을 열고 精勤하기 오십여 년에 많은 祥瑞가 있었다 했다(卷第五 避隱第八: 包山二聖).
이러한 사상들은 분명 阿彌陀佛의 加護가 이 땅에 깃들어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할 것이다. 그러나 彌陀信仰의 귀결로서 西方淨土를 懇求한다는 자세는 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西方淨土思想으로서 이를테면 彼岸淨土信仰이라면 또 하나는 此岸淨土思想이라 할 수 있다. 서방정토로 간 경우로는 旭面, 廣德 嚴莊, 布川山 比丘를 들 수 있다. 旭面은 천한 종의 몸으로 屋樑을 뚫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眞身으로 변하여 蓮花臺에 앉아 大光明을 발하며 천천히 갔다(卷第五 感通 第七: 郁面婢念佛西昇). 廣德은 16觀, 嚴莊은 揷觀을 닦아 彌陀淨土에 갔다(卷第五 感通 第七: 廣德  嚴莊).  良州 布川山 석굴에서 來居하여 彌陀念佛하던 比丘는 聖衆이 서쪽에서 와서 來迎하였다(卷第五 避隱第八: 布川山  五比丘).
그리고 이 땅이 바로 미타정토라는 이를테면 此岸淨土思想은 南白月二聖과 五臺山 사상에서 잘 보여진다.
南白月의 努 夫得은 彌勒尊이 되고,   朴朴은 無量壽尊이 되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白月山南寺의 彌勒尊像은 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고, 彌陀像은 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卷第三 塔像第四: 南白月二聖  努 夫得    朴朴).
신라의 이러한 미타신앙은 오대산 사상에서 집약되었다. 오대산 사상을 정립한 결정적인 단서로 생각되는 바, 寶川의 유언에는 西大에 南面하여 彌陀房을 두고 無量壽佛像과 白紙에 그린 無量壽如來 및 大勢至菩薩을 안치하고 福田 五員을 두어 낮에는 法華經 8권을 읽고 밤에는 彌陀禮懺을 하며 水精社라 하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신라시대에서부터 왕공귀족에서부터 천한 종에 이르기까지 至心으로 歸命했던 아미타불과 그 귀명의 사상을 정립했던 오대산 사상은 고려시대로 착실히 전승되었다.
먼저, 의종 12년 홍두적의 침입 이후 태조, 충선왕, 충목왕 등 9묘의 신주는 향교에서 제향하다가 임시로 숭인문 미타방에 모셨다고 했다. 즉 조상숭배와 미타정토 사상이 동 비중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 김치양은 궁성 서북 모퉁이에 十王寺를 짓고 鐘을 조성하면서“동방의 나라에서 살고 있을 동안 같이 善을 닦고 후에 서방정토로 가서는 함께 正覺의 證果를 얻자”라는 명문을 새긴 바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보다도 확실하게 고려시대의 아미타신앙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있다. 바로 고려불화에 그려지는 아미타관계 도상들이다. 다시 {高麗時代의 佛畵}을 상기하자면 고려불화는 阿彌陀, 觀音, 地藏의 압도적인 우세에 羅漢과 釋迦 등의 분포를 보여준다. 그리고 五臺山의 五方佛은 東觀音 南地藏 西彌陀 北釋迦와 羅漢, 그리고 中央의 毘盧遮那와 文殊였다. 그러므로 고려불화의 사상적 근거가 단순히 고려불화 혹은 고려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오대산 신앙까지 소급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 바탕에 미타정토를 화엄의 교학에서 해석한 신라 및 중국의 화엄가들이 있다.
화엄과 정토사상의 연관성은 의상이나 신라불교, 혹은 고려불교에서의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중국 화엄종의 澄觀, 宗密에서도 발견된다. 澄觀(738-839)은 {大方廣佛華嚴經疏} 卷56에서 緣境念佛門, 攝億唯心念佛門, 心境俱泯念佛門, 心境無碍念佛門, 重重無盡念佛門의 五種門念佛을 통하여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는 주장을 펼쳤고, 宗密(780-841)은 그의 저서인 {華嚴經 普賢行願品疏 } 제4에서 稱名염불, 觀像염불, 觀相염불. 實相염불의 四種念佛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澄觀과 宗密의 주장은 역시 염불의 대상인 아미타불이 毘盧遮那의 덕을 나타내며, 극락정토 역시 華藏世界의 佛土에 포함된다는 사상으로 집약된다. 다시 말하자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역시 화엄의 세계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특히 澄觀은 無量壽經을 인용하면서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是心是佛是心作佛)"이라 하여 자신이 {華嚴經疏}에서 주장하는 五種門念佛이 화엄의 세계에서 비롯하되 무량수경에 연결될 수 있는 개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IV. 고려불화의 화엄사상과 밀교의 교섭

華嚴經(avataMsaka-suutra)은 兜沙經이나 十地經(daSabhUmaka-suutra)등과 같은 단행경전들의 집성경전이다. 이 단행경전들은 인도에서 2세기 초에 집성되기 시작하여 중국에서는 2-3세기에 한역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집성경전이 만들어진 후에도 1세기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초기집성경들이 중국에서 번역된 셈이다.
이 초기집성경들은 다시 60화엄, 80화엄, 40화엄의 大本華嚴經으로 결집되어 중국에서 번역되었다. 먼저 60화엄은 418-420년간에 佛陀跋陀羅(Buddhabhadara)가 번역했다. 80화엄은 695-699년간에 實叉難陀($ikSaananda)가 번역했다 했으니 대략 3백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 그리고 40화엄은 般若三藏이 795-798년간에 번역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80화엄과는 약 1백년, 60화엄과는 4백년 가까운 시간차가 벌어진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려불화가 주로 그려진 것이 13-14세기라고 보면 60화엄, 80화엄은 신라와 통일신라에서 수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40화엄까지도 충분히 사상적 근거로서 제공되었을 것이다.
화엄경은 한역경전의 충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경전의 내용과 사상이 그대로 번역되어 유포되었겠지만 시대상황이나 당시 신앙의 행태, 經疏나 論藏, 敎判, 圖記 등의 접근방식, 그리고 불교교학의 변천에 따라 견해나 해석의 차이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澄觀의 華嚴經疏, 法藏의 華嚴五敎章, 義湘의 華嚴一乘法界圖 등은 화엄의 사상성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의 예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화엄사상이 시대적, 지역적 요청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성을 암시한다.
밀교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을 수용한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밀교 계통의 경전과 전적은 화엄경과 동시대에 번역, 전파되었다. 후한에 왔던 安世高는 148년 경에 雜密系의 卒逢賊結衣呪經을 번역했다. 純密系 경전으로는 725년에 善無畏가 大日經을, 753년 不空(amoghavajra)이 金剛頂經을 번역했다.
중국의 불교를 수입했던 삼국시대에는 주로 雜密계통의 밀교사상이 성행했다. 고구려에는 密呪信仰, 백제는 請觀音陀羅尼經이나 七佛所說神呪經, 妙見信仰 등 雜密이 유행했다. 신라 역시 7세기 경 明朗의 文豆累法이 치병과 호국의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護國佛敎 또는 護國密敎는 주로 雜密의 흐름이었다. 문무왕 10년(676년) 당나라 장수 薛那의 50만 원정군을 정주 해상에서 격침하고 이듬해 趙憲 장군의 5만 군사를 물리친 것은 明朗의 神印, 즉 문두루비법(Mudra)이었다. 文豆累秘法이란 동진의 帛尸梨密多羅가 번역한 大灌頂神呪經 제7경인 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의한 밀교 주술을 말한다. 
이어 665년(문무왕 5년)에 귀국한 혜통은 善無畏 삼장에게서 배운 순밀계통의 摠持(dharani) 즉 眞言 혹은 陀羅尼신앙을 펼쳤다. 7세기 말에서 8세기에는 義林, 不可思議 등이 胎藏界 金剛界의 曼茶羅法을 수용했다. 그러나 신라불교에서의 이러한 시대상황은 고려시대에는 밀교화한 의례에 치중하면서 양계만다라로 발전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불교, 그 중에서도 화엄과의 부단한 교류에 의해 방향지워졌다. 그만큼 화엄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의 불교문화를 계승하려 했다. 그러므로 잡밀 계통의 밀교가 화엄과 융섭되어 의례화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大寂光殿에 毘盧遮那佛은 물론이거니와 阿彌陀三尊圖, 阿彌陀淨土圖 등과 함께 神衆幀畵까지도 봉안할 수 있는 사상적 포용성이 태조의 숭불자세에서 암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1. 華嚴神衆의 曼茶羅的 再構成

태조는 그 23년에 開泰寺가 낙성되었을 때 화엄법회를 개설하고 친히 疏文을 지었을 만큼 화엄과 가까웠다. 즉위한 이듬해에 都內에 지은 열 개의 사원 중 首寺刹에는 毘盧遮那佛을 모셨다. 그러면서도 즉위초에 신라 明朗의 雜密계통을 이어받은 光德과 大緣을 現聖寺에 모셔 神印宗을 개립했다. 또 즉위 5년에는 藥師琉璃光如來와 日光 月光보살을 모시는 밀교계통의 日月寺를 짓고 7년에는 九曜堂을 창건했다. 여기서 九曜란 木星, 火星, 金星, 水星, 土星, 太陰, 太陽, 羅 , 計都를 말하며 밀교적 신앙에 바탕한다.
또한 태조 왕건은 法王寺와 더불어 內帝釋院을 지었으며, 7년에는 外帝釋院을 지었다 했다. 內帝釋院은 帝釋信仰이고, 外帝釋院은 帝釋의 眷屬 神衆信仰으로서 四天王, 龍王, 八觀 등이다. 帝釋信仰을 포함하는 神衆信仰은 神衆像들이 曼茶羅的인 도상의 형태로 展開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려의 外帝釋院은 태조 갑신 7년(924)에 창건되었으며 고려사 세가에만 모두 79회 역대 왕들의 외제석원 行幸 기록이 있다. 그 중에서 문종 무자 2년(1048) 여름 4월 경오일에 왕이 당시 의식화되었던 관행대로 '외제석원에 가서 중이 軒欄에서 불경을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으므로 외제석원이 강원이나 강당의 역할도 했을 터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중, 나한 등의 가호를 비는 의식봉행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나한재를 올린 기사를 찾을 수 있다. 즉 숙종 무인 3년(1098) 봄 정월 갑술일, 명종 계사 3년 (1173) 봄 정월 기유일, 명종 정유 7년 (1177) 8월 계사일에 왕이 外帝釋院에 가서 羅漢齋를 올렸다. 다음에는 전염병 퇴치, 祈雨, 勝戰, 消災 등의 목적으로 외제석원에 행행했던 것이니 고려의 신중신앙은 뿌리가 깊다 할 것이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에서 왕의 외제석원 행행기록은 아래와 같다.

예종 경자 15년(1120) 8월 신미일에는 왕이 외제석원에 가서 5부(部)에 명령하여 3일 동안 반야경을 읽어서 전염병을 퇴치하게 하였다.
인종 경신 18년(1140) 윤유월 정유일에 선경전(宣慶殿)에서 기도를 하고 비를 빌었으며 무술일에는 외제석원(外帝釋院)에서 왕이 친히 비를 빌었다.
고종 정해 14년(1227) 겨울 10월 경술일에 왕이 외제석원에 가서 대신들을 시켜 천황당(天皇堂)에 기도를 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빌었다.
충렬왕 계묘 29년(1303) 겨울 10월 임자일에 왕이 외원(외제석원)에 가서 소재 도량을 베풀었다.

神衆信仰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神衆道場은 華嚴經사상에서 출발한다. 華嚴神衆道場, 또는 天兵華嚴神衆道場이라고 부르는 도량에는 33천을 위시하여 天神, 天王 등이 부처님과 불법을 호위한다. 60화엄의 제1장 世間淨眼品에는 普賢菩薩, 普德智光菩薩, 普明師子菩薩, 普勝寶光菩薩, 普德海幢菩薩, 普慧光照菩薩, 普寶華幢菩薩, 普勝軟音菩薩, 普淨德焰菩薩, 普相光明菩薩, 大光海月菩薩, 雲音海藏菩薩, 德寶勝月菩薩, 淨慧光焰自在王菩薩, 超趣華光菩薩, 無量智雲日光菩薩, 大力精進金剛菩薩, 香焰光幢菩薩, 月德妙音菩薩, 光明尊德菩薩 등을 위시하여 微塵數의 金剛力士들, 道場神들, 龍神들, 地神들, 樹神들, 藥草神들, 穀神들, 河神들, 海神들, 火神들, 風神들, 虛空神들, 主方神들 主夜神들, 主晝神들, 阿修羅, 迦樓羅, 羅喉羅, 緊那羅, 摩 羅伽, 鳩槃茶 등의 신들, 月天子, 日天子, 33天王과 夜摩天王, 兜率天王, 化樂天王, 他化自在天王, 大梵天, 光陰天子, 遍淨天, 果實天子, 淨居天 등을 위시한 微塵數의 천신 천왕이 부처님의 곁에 있었다고 했다.
또한 80화엄의 世主妙嚴品에는 60화엄의 신중을 기본으로 하면서 執金剛神, 身衆神, 足行神, 道場神, 主城神, 主地神, 主山神, 主林神, 主藥神 등의 十住衆, 主稼神을 비롯한 十行爲衆, 阿修羅王을 비롯한 十廻向位衆, 33천왕을 비롯한 十地位衆 등이 열거된다. 즉 3백여년의 세월 속에서 신중이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신중은 나라마다 토속적으로 신앙되어왔던 신들을 포섭할만큼 포용력도 매우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華嚴神衆은 물론 華嚴經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華嚴經은 龍樹菩薩이 龍宮에서 가져왔다는 경전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신비화된 경전전래설에는 당시 인도 불교와는 다른 사상체계에 의해 화엄경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 다른 사상이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보다 국제적으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신중은 화엄경에 바탕하면서도 지방색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보통 화엄신중을 논할 때는 龍樹菩薩略纂偈와 80화엄의 世主妙嚴品에 근거해서 39위 신중을 화엄신중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신장은 104위까지 늘어난다. 그 중에는 물론 불교적인 神衆을 중심으로 地方神들이 포섭되지만 紫薇大帝와 七元星君 등의 도교적인 神, 그리고 祿 善 惡 등 유교적인 신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화엄신중을 불법에 포섭된 범신론적 인격신이 구상화된 것으로 보아 분류했던 자료를 상기해보면 천체, 자연, 생물, 인문, 윤리, 귀신, 護法 등 모든 神과 衆이 說法聖衆으로 망라되고 있다. 즉 33천과 天神, 天王 혹은 十住衆, 十行爲衆, 十廻向位衆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신중들을 분류해보면 천공, 신화, 자연, 인간, 인문, 관념, 불법 등의 의인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天空-허공(空神)
天體-태양(日天子/日宮天子), 달(月天子/月宮天子), 별(104위중 紫薇大帝 이하 13星君)
氣象-비(雨神), 바람(風神), 우레(雷神), 아지랑이(摩利支神)
運行-밤(夜神), 낮(晝神), 시간(時直神)
五方-오행(五行神), 방위(方位神, 方神)

神話 神鬼
靈獸-용(龍神/娑竭羅龍王), 새(伽樓羅王=金翅鳥), 뱀(摩 羅伽=大臣)
惡神-정기를 빨아먹는 귀신(鳩槃茶王), 포악한 귀신(夜叉王=捷疾鬼), 惡神(阿修羅王), 두창신(痘 痼 神)
善神-歌藥神(緊那羅王)어린이 보호신(建 婆王), 지혜 장수 재산을 주는 신(辯才天女), 保産育兒의 신(功德天=鬼子母神)

自然
自然-산(山神), 물(水神), 들(廣野神), 하천(河神), 강(江神), 흙(土神. 土公神, 堅牢地神), 바다(海神), 불(火神)
草木-나무(木神), 풀(草卉神), 숲(林神),

人間
人體-몸(身衆神), 발(足行神)
人間-명(命神)

人文
家庭-집(屋宅神, 문(門戶神), 뜰(庭神) 부엌( 王神), 터주(土地神),우물(井神), 변소( 神)
社會-성(城神), 도로(道路神)
農業-農事(稼神), 맷돌(  神)
醫術-약(藥神)
官職-록(綠神)

觀念
倫理-선(善神), 악(惡神), 상벌(行罰行病神), 선악상벌신(散脂大將)
悉地-복덕(福德大神)
思想-二儀 三才

佛法
戒法-戒律(護戒大神) 호법신(韋 天神)
曼茶羅-伽藍神, 道場神
法身思想-104위중 八金剛, 四菩薩, 十代明王
天王-大自在天王, 廣果天王, 遍淨天王, 光音天王, 大梵天王, 他化自在天王, 化樂天王, 兜率天王, 野馬天王, 三十三天王, 毘沙門天王
四天王-持國天王, 增長天王, 廣目天王, 多聞天王 

이러한 신중사상은 매우 폭넓은 범주에서 많은 선택의 여지를 가지므로 토속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별다른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공통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토속신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스로의 취약한 상징체계를 보완하기 위해 불교의 조직화된 체계와 관념을 도입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華嚴의 神衆들을 그린 이른바 華嚴神衆畵란 불법을 外護하련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결집된 신중들을 그린 일종의 단체화이다. 그리고 그 결집의 구심점은 비로자나불, 혹은 노사나불이다. 제각기 특징적인 모습과 持物을 보여주며 많은 경우 도상에 이름과 神格을 밝혀주기 때문에 판별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것은 지역과 시대적 특성에 따라 潤色, 加減, 習合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가진 것이 바로 신중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엄신중으로 그려지다가 尊像 고유의 기능들이 강조되면서 해체된 도상을 別尊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七星, 帝釋, 山神, 龍王, 十王 등이 별도로 조성된 탱화는 각각 그 존상의 이름을 붙여 독립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七星幀畵, 帝釋幀畵 등이다. 참고도판으로 제시되는 치성광여래왕림도의 치성광여래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칠성신앙은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특히 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신앙에 속한다.

63 熾盛光如來往臨圖 見本彩色, 126.4x55.9cm Fenellosa-Weld Collection Courtesy, Musem of Fine Arts, Boston, U.S.A.

이렇게 별존은 비로자나불의 권속으로부터 분리 혹은 해체된 도상이다. 애초에 화엄신중들이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결집했던 것처럼 神衆畵와 別尊畵가 화엄의 바탕에서 그려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러한 별존의 해체는 화엄에서 비롯되었으되 밀교, 특히 만다라적인 영향이 크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만다라는 일본이나 티벳 등에서 펼쳐진 만다라와는 그 성격이나 표출양상이 매우 다르다. 즉 일본이 大日經과 金剛頂經을 바탕으로 하는 純密계통의 밀교와 만다라로 나아간 대신 한국에서는 毘盧遮那와 神衆 및 別尊을 그렸으니 그것은 매우 한국적인 密敎요, 曼茶羅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초기 별존의 해체를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도상이 不動院 所藏의 毘盧遮那佛圖이다. 이 도상은 선화와의 교섭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 비로자나 삼존은 化佛의 형태로 분화하고 있다. 이 毘盧遮那佛圖는 菊竹淳一이 雲崗石窟 18洞 本尊佛 등 正面觀照性이 강한 작례에 비해 소탈한 자태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盧舍那法界人中像과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라고 평가하는 도상이기도 하다.

3 毘盧舍那佛圖;不動院 : 絹本彩色, 175.9x87.1cm, 不動院 : 日本 廣島市

도상에서 보면 비로자나불의 머리와 몸체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작은 化佛(nirmaaNya-kaaya-buddha)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심지어 화면의 테두리까지 화불군이 문양처럼 그려져 있다. 이것은 十力을 지닌 盧舍那부처님이 방편으로 중생들에게 모습을 들어내어 법륜을 굴린다는 사상, 이를테면 下化衆生의 轉法輪을 표상화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盧舍那佛의 毛孔으로부터 化身이 나온다고 했다. 

무량겁해의 공덕을 닦고 시방일체의 부처에 공양하며
무변중생해를 교화하여 노사나불이 정각을 이루니
큰 광명이 시방에 비치고 모든 털구멍마다 화신운이 나온다

無量劫海修功德    供養十方一切佛 
敎化無邊衆生海    盧舍那佛成正覺  
放大光明照十方    諸毛孔出化身雲

이 方大光明과 出化身雲은 法界人中像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盧舍那佛의 털구멍으로부터 나온 諸化生이 법의 끝에서 점차로 출현하여 化生列을 형성하고 이것이 법의로서 상징되는 법계에 차례로 열을 지어 여러 좌불렬의 모양을 이루며 법의의 아래쪽 공백 부분에 상징되어 있는 未敎化의 刹土를 향하여 충만하여 가는 상태라는 것이다. 
나아가 "여래의 코에 대인상이 있으니 이름이 一切神通智慧雲이다. 淸淨하고 묘한 보배로 莊嚴하고 모든 보석의 色光이 그 위를 덮고 있으며 그 중에 無量의 化佛이 寶蓮華에 앉아 모든 세계에 가서 일체보살과 일체중생이 되어 不可思議한 諸佛의 法海를 연출하나니 이것이 35번째 大人像이니라"라고 화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화신은 노사나불에서 시방으로 퍼지는 광명이나 구름처럼, 화불은 여래의 코에서 일체의 보살과 중생이 되는 법해로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노사나불의 大光明이나 諸佛의 法海는 불변하지만 그 빛이 닿는 세계나 법해의 중생은 근기와 소망이 다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라면 중생의 현실적인 이익, 즉 밀교식으로 말하자면 世間的 悉地에 따른 소망에 부응하여 다양한 화신이나 화불로 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분화된 화불, 별존은 중생의 근기와 소망의 공감대가 달라지면 또한 이후라도 분화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2. 五方佛思想의 신라적 원형

화엄의 포용력을 극대화하여 보여준 것 중의 하나에 밀교가 있다. 원래 밀교는 대승경전의 사상과 인도의 전통적인 주술 및 明呪신앙이 결합하여 체계화된 교리이다. 일반적으로 주술적인 雜密에 대하여 純密이라 부르는 大日經, 金剛頂經 중심의 밀교에서는 華嚴學을 비롯하여 般若思想, 中觀 및 瑜伽行派의 사상에 바탕한 밀교의 교학을 전개시켰다. 
이러한 밀교의 회화적 전개는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일본과 한국의 불교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양국 모두 화엄학이 성행하였지만 일본은 華嚴學에 바탕을 둔 純密로서의 밀교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最澄과 公海에 의해 兩界曼多羅와 別尊曼茶羅가 전래되었고 점차 別尊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華嚴을 바탕으로 하되 雜密을 수용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初期 純密的인 단계에 머물렀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에는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의 양계만다라나 별존만다라는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밀교의 발전과 함께 대승의 顯敎의 발달과 함께 널리 신앙되었던 普賢, 文殊, 觀音, 地藏 등은 密敎에서 菩薩部에 편입되었다. 普賢은 一身三頭象, 一身四頭象, 二臂像, 二十臂像으로 도설된다. 文殊는 歡喜藏摩尼寶積如來, 혹은 普見如來 등으로 바뀐다. 觀音은 十一面觀音, 千手觀音, 如意輸觀音, 聖觀音, 馬頭觀音, 不空 色觀音, 准提觀音의 六觀音으로 분화되었다. 地藏은 南方寶生如來 또는 中尊地藏薩 로 변신한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화, 특히 고려불화에는 이러한 변신을 보여주는 밀교계통의 그림이 거의 없다. 현재까지 밀교계의 불화로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千手觀音圖 한점이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물론 밀교로 편입되었던 대승경전의 다른 보살들 역시 그려지지 않았거나 드물게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고려초에 廣學과 大緣에 의한 現聖寺의 창건과 神印宗의 開立, 충렬왕 원년에 書寫된 不空絹索神變眞言 30권, 충숙왕 15년 국왕발원 金書秘密大藏 130권의 제작 등의 사례에 비추어 밀교신앙이 활발했을 것으로 추측한 菊竹淳一은 도상적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들은 아마도 한정된 도상을 묵수하려는 경향이 농후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계에서 행해지던 많은 밀교적 행사와 이례에도 불구하고 고려불화에서는 밀교도상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고려인들이 통념화된 도상들만 고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 도상의 반복, 답습, 협착성이라는 관점과 고려불화의 특징이라는 관점들이 상반된 의견을 개진하면서 논의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 논의의 단서는 오히려 신라불교의 특징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말하자면 신라시대에 통념화된 도상의 원형을 밝힌다면 이 논의는 쉽게 결론으로 이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신라불교는 화엄 교학의 기본 틀에서 밀교를 수용했다. 그러나 밀교의 체계화 및 독자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종이 융성하게 되고, 따라서 더 이상의 밀교화가 진척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도상 역시 초기 밀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다가 곧 선종화가 성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극채색으로 그려진 존상화가 밀교적으로 변용하는 초기단계의 도상과 수묵으로 그려지는 선종풍의 나한도가 동시대에 발견되는 것이다.
먼저 화엄과 밀교의 교섭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바, 호암미술관의 千手千眼觀音圖를 보면

100 千手千眼觀音圖 絹本彩色, 93.8x 51.2cm 韓國 龍仁 湖巖美術館 

천수천안을 표현하기 위하여 손과 눈을 그리긴 했지만 그것은 뒤쪽에 그려진 화불과 마찬가지로 變化觀音이라기보다는 기존의 觀音圖에 千手千眼을 덧붙인 것처럼 보이고 있다. 즉 본격적인 변화관음의 단계라고 보기에는 분화가 덜된 그림으로 보이는 것이다. 더욱이 이 그림의 아래 왼쪽에는 善財童子가 그려져 있으므로 결정적으로 화엄경 入法界品의 바탕에서 그려진 觀音畵의 千手千眼觀音的 변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밀교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고려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즉 이와 거의 같은 도상이 1532년에 淨土寺에서 조성된 바가 있으므로 적어도 조선시대 전반까지는 화엄경을 도해한 것으로 판단되는 千手千眼觀音圖가 그려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는 그렇더라도 공감대의 폭이 크다라고 결론짓기보다는 도상조성상의 관성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조성사례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밀교화는 화엄의 영역에서 받아들인 밀교라는 범주를 묵수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화엄이 중심이 되는 밀교적 해석은 불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토에 세워진 사찰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華嚴佛國寺阿彌陀佛畵像讚에서 "동해 동산에 정법이 안주할만한 절이 있으니 화엄불국(사)이라 이름지었다(東海東山有住寺 華嚴佛國爲名號)"라고 읊고 있다. 신라가 화엄 불국토라는 사실이 최치원이 살았던 신라 시대에는 보편적인 인식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불국사가 오대산의 화엄밀교에서 영향을 받은 이른바 화엄만다라의 구조를 가진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서 화엄밀교란 화엄의 교리가 바탕이 되는 밀교적 경향으로, 화엄만다라 역시 화엄의 교리에 바탕을 둔 만다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각도에서 불국사를 보자.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가 751년에 김대성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했으므로 충분히 당시 신라의 불교사상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대산에서 확립된 가람만다라의 철학이나 740년대 寶川스님의 유언 및 오방불사상 역시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공감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방불 사상이다. 다시 {佛國寺古今創記}에는 574년(眞興王 35) 불국사의 중창시 毘盧遮那佛과 阿彌陀佛을 모셨다고 했다.
최치원의 大華嚴宗 佛國寺 文殊普賢像의 讚 및 序에서 보면,

佛國寺 光學藏의 講室 왼쪽 벽에 그린 遍光照 즉 毘盧遮那佛畵는 太傅에 追贈된 헌강대왕의 秀圓 權氏 法號 秀圓이 尊靈의 명복을 追封하기 위해 모신 것이다.

라고 하여 毘盧遮那佛을 이야기하고, 보살이 좌우로 단엄하게 늘어섰다고 하여 문수 보현을 암시한 후 讚을 붙이고 있다.
또 불국토란 화엄의 연화장이요, 이어서 아미타정토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불국사 담사(講室) 서쪽 벽에 무량수불화를 경건히 그려 모시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이 오늘날 비로자나를 모신 비로전과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안양문, 극락문, 극락전이라는 건축물로 重修를 거쳐 보존되어 왔다.
또 고금창기에는 관음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969-73년 문공부 발굴조사와 복원공사를 거쳐 극락전 무설전과 함께 관음전이 복원된 바 있다. 또한 고금창기에는 지장전이 있었다 하니 바로 오대산 화엄만다라와 같은 구조가 된다. 정확한 방향은 아니지만 중앙의 비로, 동 관음, 남 지장, 서 미타, 북 석가의 구도이다. 나아가 비로전을 가운데 두고 회랑을 둘렀으니 양계 曼茶羅, 특히 金剛界曼茶羅의 구획이라는 형식적 요건을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역사가 깊은 古刹들의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불국사는 오랜 세월 사상의 변천과 그에 따른 가람배치 및 건축물을 신축, 증·개축이 있었다. 그러므로 석가탑과 다보탑에서 법화경 見寶塔品의 사상을 읽을 수 있고, 석가불의 靈山佛國과 阿彌陀佛의 極樂世界를 동시에 볼 수 있으며 회랑 구조에서 曼茶羅의 영향을 유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창건의 이념을 화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불국사 가람배치를 볼 때, 중앙에 毘盧殿과 회랑의 중심에 無說殿을 두어 비로자나의 海印三昧와 언어 및 분별사량을 초월한 無說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화엄에 바탕하되 그 범주 내에서 수용한 법화 및 밀교적 사상체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불국사의 초기 밀교적인 불 보살의 만다라적 가람 배치는 오대산에서 하나의 사상체계로 정립되고 고려불화에 빈출하는 오방불의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고 믿어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오류성중의 住處로 여겨졌다. 중앙의 地爐峯에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동쪽의 滿月峯에 관음보살이, 남쪽의 麒麟峯에 지장보살이, 서쪽의 長嶺에 무량수불과 대세지보살이, 북쪽의 相王峯에 석가불과 오백아라한이 머문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중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암자를 지어 동대 서대 남대 북대라 불러 불 보살들을 예참했던 것이다. 아래의 도표는 월정사 관련 서적들과 增補文獻備考 및 삼국유사 에서 발췌, 구성했다.

<도표>


여기서 오대산의 중대 적멸보궁과 진여원이 중심이 되는 신라인의 화장세계가 전개된다.
그리고 보현행원품에서 화엄사상과의 연결가능성이 확인된 미타불과 그 권속들이 동, 서, 남을 차지한다. 그러고 화신불로서의 석가가 북쪽에 자리잡는 것이다. 이렇게 오대산에 자리잡은 오방의 불과 보살은 당시 신라인에게 보편적인 신앙행태였음을 삼국유사는 잘 말해준다. 


V. 五臺山 화엄사상의 고려불화적 전개

오대산의 眞如院은 오늘날 上院寺라고 부르는데, 文殊信仰의 본산이다. 그 중에서도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佛頭骨을 모신 淸淨曼茶羅로 알려져 있다. 眞如院은 寶川 孝明에 의해 705년(聖德王 4년)에 창건되었다. 그런데 이 오대산 적멸보궁은 주위의 산들에 에워싸인 중심점에 위치함으로써 해인사와 같은 사상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먼저 오대산의 지도를 보면 寂滅寶宮은 虎嶺峰 象王峰 麒麟山 中臺山이 마치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세운 듯한 가운데 놓여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오대산 적멸보궁이라면 오대산 정상의 비로봉에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다섯 산이 에워싼 한 가운데를 선택한 것은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가야산 해인사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해인사와 가야산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해인사를 중심점으로 가야산까지의 동심원을 작도했을 때 주요 산봉우리인 두리봉, 단지봉, 남산제일봉이 동심원상에 위치한다. 그리고 깃대봉은 동심원보다 약간 안쪽으로, 가산은 약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마치 손가락 다섯을 자연스레 오므린 한 가운데 해인사가 놓인 듯하다.
해인사와 오대산 적멸보궁의 이러한 입지적인 공통점은 두 사찰이 공유하는 창건이념과 사상이 같음을 암시한다. 사찰의 창건은 경전의 개념과 당시 불교의 이념과 철학 및 대중들의 신앙과 신행의 방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伽倻山 海印寺는 802년(哀莊王 3년)에 順應이 개산하여 利貞이 준공했다. 順應은 화엄경의 철학과 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海印三昧(saagara-mudraa-samaadhi)를 천명하고자 해인사를 세웠다고 했다. 그러므로 義湘(625-702)의 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알려진 바 해인도, 즉 화엄일승법계도의 사상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頂戴佛事, 즉 影印本 大藏經을 이고 마당에 그려진 海印圖, 즉 華嚴一乘法界圖의 굴곡을 따라 행진하는 의례가 전승되고 있는 것은 義湘의 華嚴宗風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의 바탕에서 해인사의 입지를 다시 생각해보면 의상의 화엄사상 중에서 六相圓融에 대한 비유와 해석이 적용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육상이란 總相 別相 同相 異相 成相 壞相이요, 六相의 圓融은 法界圖에서 一卽多 多卽一로 비유된다. 그것은 하나가 모든 것이요, 그 하나의 티끌 안에도 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원융의 세계로써 바로 화엄의 법계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법계도기총수록에는 이 원융의 세계를 다시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 표현한다. 이는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가 즉 일체이고 많은 것이 하나'이며, 나아가 '극히 작은 한 먼지 중에서도 시방이 들어있고, 일체의 먼지 중에서도 시방이 들어 있다'는 경개라고 해석된다.
 이러한 圓融의 세계는 [釋華嚴旨歸章圓通 ]를 지은 균여에게 있어서도 不卽不離, 不一不二한 中道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의상의 화엄관, 나아가 육상원융에 대한 해석은 고려시대에도 면면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정신과 사상에서 볼 때 해인사가 방사상의 혹은 동심원상의 다른 봉우리들의 가운데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화엄 및 육상원융의 해석이 적용되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러므로 오대산 적멸보궁이 해인사와 유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보편적 공감대였던 의상의 화엄관과 나아가서는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 文殊信仰의 初期密敎的 변용

오대산 사상의 중심은 文殊信仰이다. 그것은 중국의 五臺山 文殊信仰에서 비롯하였으되 나라 전체를 불국토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
문수사상은 중국 山西省 五臺山에서 발달했다. 오대산은 淸凉山이라고도 하며 문수사상의 근거를 화엄경에 두고 있다. 60화엄 제3장 如來名號品에는 文殊菩薩(manjusri)이 부처님의 境地, 生命, 힘과 任務 그리고 빛과 知慧와 禪定을 나타나게 해줄 수 있는 초인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제 27장 菩薩住處品에는 문수보살이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에서 일만 권속을 두고 항상 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했다. 
문수신앙은 이어, 불멸 후 贍部洲 동북방에 있는 大辰那 나라의 五頂에 遊行居住하면서 菩薩衆과 無量無數의 藥叉 羅刹 緊那羅 摩 羅伽 및 사람과 사람이 아닌 중생을 위해 설법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한다.
그 청량산은 澄觀(738-839)의 [華嚴經疏]에서 중국의 산으로 표기되었다. 즉 '代洲 雁門郡에 있는 五臺山을 淸凉山이라고 한다. 그 중에 현재 淸凉寺가 있다' 라고 기술했던 것이다. 즉 동북방 대진나의 오정을 중국인들은 오대산 즉 청량산으로 생각했으며 신라인들은 역시 같은 이름의 오대산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보살주처품의 보살들을 비교해보면 60화엄과 80화엄에서 조금씩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60화엄과 80화엄에서 오직 문수보살만은 住處와 菩薩名이 일치한다.

菩薩住處品 60華嚴 27章/ 80華嚴 32章의 비교표


이렇게 통시적으로 고찰해보자면, 60화엄이 420년대에, 80화엄이 700년대에 번역되었다고 할 때 그 300년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문수보살은 일관성있는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화엄학자들이 자내증의 표상이라 할 때는 보현보살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張愛順 교수 및 高崎直道의 표현대로, 보현이 "화엄경의 설자"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長谷岡一也는 문수보살이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으로 요약되는 대승 보살도의 이상을 열 가지 방일함이 없는 마음(無疲厭心)으로 설한 후, 감화를 받아 무상보리심을 발한 비구들을 권면하여 보현행에 주하게 한다는 인도적 역할에 주목한다. 또한 선재동자에게 보리심을 발한 것을 칭찬하며 一切智를 구하는 자는 善知識에 친근하며 피곤해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깨우쳐주며, 역시 보현행을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현보살의 비중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高崎直道는 역사적으로는 兜沙經과 本業經에서 문수보살이 대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원시화엄경의 성립기에는 문수보살이 반야경을 계승하여 여래출현과 그 因行을 설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보현보살은 大經, 즉 화엄경의 성립과 때를 같이 하여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화엄사상의 전개과정에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역할이나 비중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화엄사상이 밀교의 배경사상으로서 태장계 만다라와 금강계 만다라로 나뉘게 되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다. 즉 태장계만다라는 보현행원을 중심으로, 금강계 만다라는 문수의 지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오대산 사상이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계 만다라와 유사하게 전개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배경에서 고려의 불화에 금강계 만다라의 기본 틀 안에서 전개되는 불 보살의 도상들이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문수신앙을 신라에 이식했던 것이 慈藏이었다. 당시 보편적 공감대이자 국민적 염원이었던 신라인의 불국토신앙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문수신앙이 도입되었다면 문수보살이 신라와 인연이 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확실한 물적 증거와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慈藏이 寂滅寶宮에 봉안했다는 佛舍利는 慈藏이 중국의 五臺山, 즉 淸凉山에서 文殊菩薩의 감응으로 얻었다고 했다. 선덕왕 5년(636)에 입당한 자장은 淸凉山 淸凉寺의 太和池 文殊石像 앞에서 7일간 경건하게 기도한 끝에 꿈에 대성으로부터 梵語로 된 四句偈를 얻었는데 꿈을 깨고 나서도 기억은 나지만 범어라 해독할 수가 없었다 했다. 그런데 이 사구게는 80華嚴經 卷第十六 須彌頂上偈讚品 十四에 실려있다. 이 偈讚은 西方의 勝慧보살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勝慧菩薩 偈讚은 '그때에 勝慧菩薩이 부처의 위력을 이어 시방을 두루 관하시고 게송을 읊어 설법하시되'로 시작한다. 그 첫 번째는 여래의 지혜, 두 번째는 범부의 미혹, 그리고 세 번째가 일체법의 요지이다. 
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바, 자장이 꿈에 받았다는 예의 범어와 한문, 번역은 다음과 같다.

呵 婆佐 (가라파좌낭-了知一切法) 일체법을 깨달게 되면
達    (달예치구야-自性無所有) 자성이 무소유임을 알 것이다.
 伽 伽 (낭가희가낭-如是解法性) 이같이 법성을 해석하면
達 盧舍那(달예노사나-卽見盧舍那) 즉시 노사나불을 볼 것이다.

말하자면 이 게송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설해진 것이며 勝慧菩薩은 대변자에 불과하다. 그럼 그 부처님은 누구인가. 바로 노사나불이다. 
원래 노사나불은 청정한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원만한 불신으로서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을 일컫는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약칭이며 화엄종의 본존을 의미한다. 60화엄에 보면 노사나보살이 싣다르타 태자로 화현하셨다는 구절이 보인다. 또 80華嚴의 入法界品에는 '盧舍那如來가 도량에서 정각을 이루시어 일체법계중에 청정한 법륜을 굴리신다(盧舍那如來 道場成正覺 一切法界中 轉於淨法輪)'는 구절이 보인다.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보면, 한 스님이 홀연 金點袈裟, 佛鉢, 佛頭骨을 가지고 慈藏에게 왔다고 했다.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그리고 사구게를 해석해준 다음 신라의 명주 경계에 있는 오대산에 일만 문수가 상주하니 가서 뵈라고 일러준 바 있다. 삼국유사는 이어 태화지에 사는 용의 말을 빌어, 慈藏에게 四句偈를 해석해주고 佛頭骨과 金點袈裟, 그리고 佛鉢을 전해준 스님이 문수보살임을 밝힌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본다면 자장이 꾸몄건, 역사적 사실이건 문수보살은 능동적 발원에 의해 신라의 오대산신앙을 催促하고 있다. 연후에 문수보살은 眞如院, 즉 오늘날의 上院寺에서 매일 아침 寅時에 36형으로 化現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36형은 문수보살에게서 기대되는 상징이라기보다는 毘盧遮那佛이나 盧舍那佛, 나아가서는 모든 부처들에게서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文殊化現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문수신앙이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은 보통 비로자나의 협시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신라인에게 문수보살은 비로자나와의 연관에서 생각될 수 있다. 毘盧遮那는 생각하기에 따라 신라인에게도 친밀한 존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상고시대부터 전래되어온 토속적인 태양숭배사상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석가모니 부처님, 즉 고타마 싯다르타는 신라와 무관한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또는 초월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신라인에게는 인도태생이면서 淨居天에서 설법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비로자나불이 친근할 수 있고, 그 부처님의 권능을 나투어 신라인에게 영험을 보이시는 變化法身으로서의 문수보살을 모시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됨직도 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자장의 의도한 바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자장이 이식한 문수신앙은 신라의 왕자인 寶川과 孝明에게로 전승되어 36化現 등의 영험으로 알려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眞如院을 중심으로 하는 오대산 사상을 정립한 것이 寶川의 유언이었다.

황색처인 중대의 진여원 가운데는 니상의 문수부동상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런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위시하여 36화형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 5원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를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을 염하게 하여 화엄사라 이름하라. 보천암을 개창하여 화장사로 하고 원상 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봉안하라. 복전승 5원을 두어 낮에는 장문장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염하게 하여 해마다 백일동안 화엄회를 열게 하여 법륜사라 이름하라.

  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문수사상이 화엄에 바탕하고 있음이 오대산 사상의 중심지인 중대 진여원에 베풀어지는 화엄경, 화엄사, 화엄회 등을 통해 확실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어 문수갑사를 다섯 寺社의 집결장으로 하고 복전승 칠원을 두어 주야로 화엄신중예참을 행하라(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는 구절이 뒤따른다. 이 구절은 특히 寶川이 생각하는 화엄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즉 화엄신중이란 화엄을 중심으로 하는 불법을 지키는 무리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寶川은 오대산에서 문수와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의 오방불사상을 펼치면서 화엄신장으로 에워싸인 철저한 화엄불국토를 실현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寶川이 유언으로 남겼던 기록, 즉 '산중에서 행하는 바 우리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을 중심으로 도표를 만들어 보자.

 

이 도표에 나타난 불보살은 약술하면 東 觀音, 南 地藏, 西 彌陀, 北 釋迦 및 中 毘盧遮那와 文殊로 요약될 수 있다. 역시 이 구도는 13세기에서 14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던 고려불화의 빈도에 따른 유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차이가 있다면 고려불화가 현존 도상들의 빈도별로 아미타 및 팔대보살, 즉 관음, 지장을 중심으로 석가, 비로자나 및 문수 보현보살의 조성 예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구도는 고려불화가 무작위 표집되어 오늘날 현존한다는 전제하에서 고찰할 때, 5세기에 걸친 불 보살에 대한 비중의 변모일 따름이지 신앙 행태가 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寶川은 다시 유언에서 '대대의 군왕이 잊지 않고 준수하여 행하여 준다면 다행한 일이겠다(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국왕이 장수하고 인민이 안태하고 문무가 화평하며 백곡이 풍요(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虎和平, 百穀豊穰矣)'할 것이라는 구절을 당근에 비유한다면 앞의 잊지 말고 준행하라는 당부는 채찍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언은 오대산 사상을 위한 감로수와 같은 것이다. 신라 왕자의 佛事요, 그 불사를 행하면 무엇보다 국왕이 장수한다는데 역대의 왕들이 소홀이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점은 신라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믿는 고려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寶川의 생전에도 眞如院에 대한 聖德王의 배려는 각별했다. 그것은 특히 華嚴社의 특혜로 나타난다. 寶川과 孝明왕자가 中臺에 眞如院을 개창하자 왕이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오대산에 왕림했다. 전당을 짓고 泥像文殊大聖을 모셨다. 靈卞 등 다섯사람의 知識을 써서 화엄경을 오래 돌려 읽게 했다. 그리고,

 왕이 화엄사를 조직하고 오랫동안의 비용을 대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 이 산에서 가까운 州縣으로부터 倉租 일백석과 淨油 1석씩을 바치게 하는 것으로 상규를 삼았다. 또 진여원으로부터 서쪽 6천보를 가서 牟尼岾과 古伊縣 밖에 이르는 시지 15결과 율지 5결과 좌위 2결을 주어 처음으로 莊舍를 설치하였다 

고 했다. 이 때 중대 眞如院의 華嚴社는 東 觀音社, 南 金剛社, 西 水精社, 北 白蓮社의 구심점이었으니 華嚴, 나아가 文殊信仰의 비중을 알만하다 할 것이다. 
文殊信仰은 이후 五臺山信仰이라는 총체적인 이름으로 유전되었다. 寶川이 유언한대로 신라의 왕들과 고려, 나아가 조선의 세조에 이르기까지 오대산은 국왕의 願刹이거나 消災道場으로써 비호와 원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華嚴의 文殊는 密敎의 文殊師利와 공유하면서 그 消災祈福的인 위신력을 나투게 된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문수신앙은 굳건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서 화엄과 밀교가 신라불교라는 콘텍스트에서 만나 어떠한 양상으로 현전하는가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 먼저 고려사 세가에는 문수신앙에 대한 많은 기록이 보인다.  
예종 2 예종 경인 5년(1110) 윤 8월 신유일에 왕이 삼각산 藏義寺에 갔다가 그 길로 僧伽窟에 갔다. 여기서 通義侯 僑를 시켜 文殊窟에 가서 태후와 모든 종친들과 각궁 공주들의 명의로 각각 옷을 시주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특히 문수회에 지극정성이었다. 세가에 수록된 演福寺 문수회만도 6회였다. 특히《고려사》세가에는 공민왕이 演福寺에 가서 文殊會를 크게 차려 놓고 손으로 金爐를 떠받들고 스님들을 쫓아다니면서 향을 피웠는데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辛旽은 文殊會를 벌여 공민왕의 元子誕生의 기대를 부추기고 있다. 이어 두 번째 演福寺의 文殊會에는 불전주위에 코끼리나 사자를 새긴 촉대 위의 기둥만한 초를 세웠고 진수성찬을 다섯줄로 배열하였으며 비단 꽃과 오색 봉황 및 금과 은으로 만든 假山이 눈부셨다고 했다. 이 문수회에서는 삼백명의 스님이 須彌山을 안고 돌면서 불공했으며 자진해서 불공에 참가한 자가 무려 8천명이라 했다. 나아가 사람들이 僉議, 즉 辛旽이 바로 文殊菩薩의 後身이라 했으니 고려말까지도 문수신앙은 확실하게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아서 정도전은 공민왕의 威儀損傷 및 財物 蕩盡을 거론하면서 궁중 百高座와 演福寺 文殊會를 통열히 비판하고 있다. 
또 김자수 역시 內佛堂의 法席, 演福寺의 文殊會, 불경 강의, 스님들에게 음식공양 등을 진행하였으며 '존엄한 임금으로서 무릎을 굽혀 중놈을 스승으로 삼고 친히 제자로서의 예절을 지켰으나 갑인년에 가서 종래 부처를 섬긴 복을 받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도전의 비판과 아울러 반어적으로 문수회에 기울이는 왕실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고려불화에는 釋迦三尊圖의 부분도로 문수보살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석가란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4 釋迦三尊圖(文殊菩薩)見本彩色 216.2X110.7CM 日本 靜嘉堂文庫美術館

일반적으로 석가삼존도, 혹은 비로자나 삼존도는 문수, 보현이 협시의 형식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독립된 세 점의 그림이 삼존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 삼존도라는 형식에서 한 걸음 진전된 양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수신앙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고려불화에서는 歡喜藏摩尼寶積如來, 혹은 普見如來 등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연 문수보살, 혹은 문수사리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즉 고려불화에서 현재 한 점 남아있는 千手千眼觀音圖와 마찬가지로 문수신앙은 충분히 밀교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엄의 범주 내에서만 도상화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고려불교에 있어서 문수신앙의 밀교화 가능성은 조선시대의 설화를 통해서도 유추될 수 있다.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문수신앙은 世祖를 통하여 잘 보여지고 있다. 세조의 문수신앙은 寶川이 남긴 遺言 중의 하나인 國王長壽에 대한 현실적인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세조는 문수동자의 親見感應으로 피부병이 낳았다 했다. 그러나 설화를 중심으로 판단하건대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이야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것은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그 모습을 본 따 그린 그림을 보고서 나무로 깎아 만들었다는 동자상이 雙 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쌍계는 당시 불화나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 모양으로서 쌍 상투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冠禮 이전에 아이들이 했지만 조선에서는 궁중에서 한 일이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조선의 아이들은 풀어헤친 머리거나 編髮이라는 땋은 머리였다. 더욱이 세조가 강원도 村童으로 알았던 아이라면 분명 쌍계머리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적어도 세조가 오대산에서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설화에 관한 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화의 진위는 조선의 문수신앙을 설명하는데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설화는 적어도 조선시대, 아니면 그 이전부터 문수신앙이 文殊師利法寶藏陀羅尼經처럼 밀교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經에 의하면 世尊은 金剛密迹에게 文殊童子의 新通變化가 自在 莊嚴하고 널리 일체중생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일러준다. 즉 末世에 佛法이 滅하고 惡法이 增長할 때, 또 五行이 무질서해지고 陰陽이 교차할 때, 기상이변이나 천체의 변괴 등 모든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악귀는 여자처럼 꾸미고 중생에게 모든 병을 준다. 그것이 무슨 병이냐 하면 喉閉 瘡疥癩腹痛이다 목잠김, 악성종기, 부스럼, 옴, 문둥병, 복통 등등의 온갖 몹쓸 병에 걸려 의사가 소용이 없을 때 일주야 팔관재개를 하고 다라니를 외면 낳는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조에게 있어서 문수신앙은 피부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러한 문수신앙은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世間的 悉地라는 이름의 密敎的 對症療法이었다. 그러한 영험을 성취하기 위해서 消災祈福道場은 신성한 장소에서 청정한 고승에 의해 엄숙히 거행되는 曼茶羅的 祭壇이어야 한다고 믿어졌다. 세조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 사실성 여부를 떠나서 세조치세인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대산이 청정한 제단으로 인식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보천의 오대산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五臺山 曼茶羅는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것이지만 기실 밀교적 身密로서의 手印, 口密로서의 口誦, 意密로서의 觀心의 수행은 이후 한국불교의 큰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敎宗係의 敎學僧이라도 만다라의 도형과 神呪를 배우지 않으면 의식을 執典할 수 없을만큼 신성한 의식과 의례로 자리잡은 밀교의례는 법당으로, 가람으로, 국토로 벋어나갔던 것이며 그 진원지 중의 하나가 오대산이요, 그 핵심이 문수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밀교화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고려불화에서 밀교도상과 함께 문수보살상은 아미타관계도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숫자만 남아 있다. 그것은 화엄을 바탕으로 하는 밀교와 문수신앙이 고려에 이르러 보현행원을 중심사상으로 하는 아미타신앙으로 轉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수신앙은 표면적으로는 오대산을 배경으로 하는 청정도량 사상의 표상일 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보다 중요한 고려불화의 핵심사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화엄과 金剛界 曼茶羅의 互換性

신라의 五臺山에서 보여지는 五方佛思想은 전통적인 五嶽思想, 五方思想 및 五彩思想에 근접하는 사상체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고대 한국의 토속신앙이 불교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어떻게 그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지, 혹은 불교의 밀교화에 어떻게 적응 혹은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오방사상의 기원은 五嶽思想이다. 舜임금이 오악에 제사를 지냈다 했으니 그 유래가 깊다. 남부여, 전백제에는 三山이 있어 전성기에는 神人들이 늘 날아다녔다고 했고, 신라에도 五岳, 三山의 신이 때로 간혹 현신하여 대궐의 뜰에 侍立하기도 했으며, 奈火, 骨火, 穴禮의 三山에 大祀를 지냈다고 했으며, 五嶽에는 中祀를 모셨다고 했으니, 신라의 왕자 寶川과 효명에 의한 오대산 신앙이 오악을 중심으로 하는 오방사상을 표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이 전통적인 오악사상 뿐 아니라 이 땅을 眞聖이 거주하는 佛壇으로 생각한다는 이른바 國土曼茶羅 사상은 토속신앙과 불교신앙 그리고 인도적인 신앙의 결합체이다. 즉 인도 전래의 만다라(maNGDala), 얀뜨라(yantra) 등의 영향으로 신성의식화한 청정만다라 사상이 토속신앙으로서의 蘇塗 및 三山五嶽, 星宿信仰, 陰陽五行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擇地法, 圖讖 등과 결합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환기하자면, 신라 五臺山의 五佛은 毘盧遮那 및 文殊를 중심으로 東 觀音, 南 地藏, 西 彌陀, 北 釋迦의 구도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五方佛思想은 밀교의 오방불과도 공통점이 있는데 胎藏界 五佛보다 金剛界 五佛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문수신앙이 중심이 되는 오대산 신앙의 성격을 확실하게 규정해주는 단서가 된다.
먼저 도상적으로 보아 胎藏界(garbhadhaatu)) 曼茶羅에서는 大日如來와 毘盧遮那, 無量壽와 阿彌陀여래가 同體일 뿐 나머지 불 보살은 金剛界(vajradhaatu) 曼茶羅의 五方佛보다는 오대산 오방불과의 친연관계가 확실치 않다. 반면 金剛界 曼茶羅에서는 毘盧遮那와 彌陀佛이 같은 데다가 不空成就佛이 釋迦佛과 동체이며 寶生佛이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地藏菩薩의 변화신으로 보고 있다. 또한 阿 佛(akSobhya)은 阿 佛國土의 정토적 성격 때문에 觀音의 補陀落山 정토와 비슷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오대산 오방불과 유사하게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오대산 오불과 금강계, 태장계 오불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


그러므로 新羅 五臺山 五方佛은 태장계 오불보다 金剛界 五佛쪽이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상적 접근 뿐만이 아니라 교리에서 볼 때 신라 오대산 사상은 근본적으로 금강계 오불과 유사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금강계 만다라는 대일여래의 자내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혜를 표상하는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대산 문수신앙이 금강계 만다라와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은 자연스런 추세라 하겠지만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먼저 오색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면 금강계 오색은 오대산 오색과 달라진다.
도표를 만들어보면 오대산의 오방식은 중국과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오방색과 유사하다. 다만 중앙에서 볼 때 중국에서의 황색이 신라 오대산에서는 녹색으로 바뀔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오색에 관한 한, 신라의 오대산은 전통적인 오방사상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은 고려불화의 전통이 오대산 사상을 경유하는 전통사상에 근거한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다시 금강 오불, 오대산 오불, 오색을 도표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에서 볼 때, 같음표(=)는 금강오불과 오대산오불이 같은 불보살임을 나타낸다. 화살표(->)는 금강오불과 다른 신라의 불보살이다.  

여기에서 다시 고려불화의 주조색을 오색으로 본다면 고려불화는 이 양계만다라의 오색보다 신라의 오대산 및 전통 오색, 나아가 금강계 만다라의 오색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불화의 主調色이 朱, 綠靑, 群靑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것을 오색에서 배대하면 赤, 綠, 靑이 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색만으로는 고려불화의 채색, 이를테면 관음보살의 백색 羅絲와 많은 불 보살의 노란 身色을 설명할 수 없다.

67 水月觀音圖, 1310年, 絹本彩色 419.5x254.2cm 日本 鏡神寺

그러므로 鉛白과 白土系의 白色顔料 및 銀泥와 黃土系의 黃土顔料 및 金泥에 대한 기사를 다시 정리하면 赤 綠 靑 白 黃이 된다. 이것은 오대산 및 兩界蔓茶羅의 오색과 같다. 그런데 여기에 옷주름의 먹선에 쓰인 먹을 포함시키면 綠 靑 赤 白 黃 黑이 된다. 마치 五臺山 五色과 傳統五色을 합한 것처럼 보인다.
이 먹의 검은 색에 의해 五臺山 五色 및 傳統五色은 兩界曼茶羅의 五色과 갈라선다. 그러므로 고려불화에 관한 한 양계만다라의 오색보다는 전통오색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전통신앙과 오대산 사상은 비록 체계화가 가능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금강계 만다라만큼 조직적이지는 않다. 도표로 만들어보면 金剛界曼茶羅, 나아가 밀교적인 체계화가 얼마나 치밀한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도표에서 금강계만다라의 오불은 근본회에서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사방불을 일컫는다.

 

이 금강계만다라는 다시 向下門과 向上門으로 도식화한다. 먼저 금강계 만다라에서 成身會 또는 根本會라고도 부르는  磨會는 金剛界 9회 曼茶羅에 있어서 向下門의 출발점이자 向上門의 종착점이다. 즉 1).  磨會에서 출발하여 아래로 2). 三昧耶會에서 시계방향으로 첫 번째 꺾어지고 3). 微細會에서 두 번째 꺾어져 위로 올라간다. 다시 4). 供養會를 지나 5). 四印會에서 세 번째 꺾어진 후 6). 一印會를 거쳐 7). 理趣會로 가서 네 번째 꺾어진 후 8).降三世 磨會를 거쳐 9). 降三世三昧耶會로 이르는 힘의 흐름을 向下門이라 한다. 그리고 그 반대로 9). 降三世三昧耶會에서 거슬러 올라가 다시 1).  磨會에 귀착되는 힘이 向上門이 된다.

金剛界 曼茶羅 向下門


華  嚴  一  乘  法  界  圖


一  微  塵  中  含  十  初  發  心  是  便  正  覺  生  死
                                                         
一  量  無  是  卽  方  成  益  寶  雨  議  思  不  意  涅
                                                                  
卽  劫  遠  劫  念  一  別  生  佛  普  賢  大  人  如  槃
                                                         
多  九  量  卽  一  切  隔  滿  十  海  仁  能  境  出  常
                                                         
切  世  無  一  念  塵  亂  虛  別  印  三  昧  中  繁  共
                                                         
一  十  是  如  亦  中  雜  空  分  無  然  冥  事  理  和
                                                          
卽  世  互  相  卽  仍  不  衆  生  隨  器  得  利  益  是
                                                         
一  相  二  無  融  圓  性  法  回  際  本  還  者  行  故
                                                      
一  諸  智  所  知  非  餘  佛  息  盡  寶  莊  嚴  法  界
                                                         
中  法  證  甚  性  眞  境  爲  妄  無  隨  家  歸  意  實
                                                         
多  不  切  深  極  微  妙  命  想  尼  分  得  資  如  寶
                                                         
切  動  一  絶  相  無  不  動  必  羅  陀  以  糧  捉  殿
                                                         
一  本  來  寂  無  名  守  不  不  得  無  緣  善  巧  窮
                                                         
中  一  成  緣  隨  性  自  來  舊  床  道  中  際  實  坐

이것은 衆生에서 佛로 향해 닦아가는 向上的인 생기차제의 길과 불에서 중생계를 향해 제도하려는 향하적인 구경차제의 활동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금강계 만다라의 향상문 향하문은 언뜻 보아 화엄일승법계도와 유사한 도상과 방향을 보여준다. 華嚴一乘法界圖는 60華嚴의 요체를 7언 30구 210자로 나타낸다.
화엄일승법계도에 있어서 한길로 이어지는 偈文은 如來의 一音인 禪敎方便을 뜻한다. 四面은 四攝法(sammgraha-vastu)을, 四角은 四無量心(apramaaNGa)을 상징한다. 이렇게 사면과 사각으로 만든 圖印과 진행방향으로 보면 金剛界曼茶羅 向下門과 向上門이 비슷한 형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게문은 도인의 가운데 있는 '法'에서 시작하여 54개의 각으로 꺾어져 '佛'로 귀착된다. 도인에서 보면 '衆' 즉 僧 아래에 法이 있고 다시 그 아래에 佛이 있으니 佛法僧을 나타낸 것임을 알겠다.
물론 이 법계도와 금강계 만다라의 도상적 유사성은 연대적으로나 교학적으로나 연관지을 수 있는 자료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밀교화하던 통일신라 화엄사상의 선구적 위상을 암시한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화엄일승법계도, 또는 해인도는 義湘이 44세때인 668년 당나라 至相寺의 智儼문하에서 화엄학을 배우면서 만든 게송을 도인화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금강계만다라의 소의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정경의 인도성립 시기를 670-690년으로 본다면, 오히려 해인도가 더 빠른 시기에 성립되었으며, 또 중국번역보다는 약 1세기 정도 앞선 시기에 도인화되었으므로 금강정경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밀교화가 진행중이던 중국 불교계에의 상황과 인도구법승들의 활동으로 미루어 전혀 연관이 없다고 일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금강정경의 성립이나 번역 이전에도 밀교화하는 불교의 흐름이 충분히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문제는 당시 중국과 신라의 밀교화에 따른 문헌과 자료를 궁구하여 당시 불교계의 흐름 및 영향관계를 규명할 계획이지만 분명한 것은 중국과 신라 밀교화는 그 방향이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에서 不空金剛(amoghavajra 705-774)은 720년을 즈음하여 제자인 含光과 함께 오대산 신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不空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진언종의 付法 6조로서 731년 스승인 金剛智의 유지를 받들어 인도로 들어갔던 스님이다. 인도의 佛牙寺에서 普賢아사리로부터 밀교의 대법을 전수 받고 746년 중국에 오자 현종이 不空에게 灌頂을 받았다 했다. 그런 만큼 불공의 영향력이 오대산 신앙을 밀교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무렵인 신라에서는 明曉, 義林 등 밀교승들이 당나라의 밀교 사조를 직수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740년경에 체계화된 寶川의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인 사상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725년에 한역된 胎藏界의 대일경은 이미 정형화된 신라의 화엄이나 華嚴禪의 추세를 밀치고 충분한 영역을 확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五臺山에 慈藏이 처음 草庵을 지은 것이 636년이며 寶川 孝明이 眞如院을 창건할 무렵인 705년(성덕왕 4년), 혹은 寶川이 유언을 남겼던 740년이라 하더라도 오대산에 兩界의 밀교 사상이 기존의 사상체계를 밀치고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에는 이르기 때문이다.
연대로 보아 金胎 密敎經典의 결집은 인도에서 650년부터 700년경에 이루어졌으며 중국에서 善無畏三藏과 一行이 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즉 大日經을 번역한 것은 725년이고, 不空이 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承現證大敎王經, 즉 金剛頂經을 번역한 것이 753년이었다. 이렇게 30년 가까운 번역의 시간차이에도 불구하고 寶川에 의해 740년경에 체계화된 오대산 사상이 태장계 만다라의 체계와 근접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오대산 사상이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금강계 만다라의 체계가 이미 화엄과 토속신앙의 바탕에서 형성된 오대산 사상과 보다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화엄사상의 무한한 포용력이었다.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의 위신력을 갖추고 동북방의 오대산에 유행거주하시는 문수보살이 중국과 신라에 착실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며 이미 토속신앙을 화엄의 체계 속에서 수용하여 내실화한 신라불교가 금강계만다라 및 오방불사상을 받아들여 화엄불국토 사상을 펼칠 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한 것이 다름 아닌 화엄의 깊고 넓은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의 탄탄한 사상체계에서 확립된 신라불교를 계승한 고려불교와 그 정신을 표현한 고려의 불화에서는 오대산 사상에서 구현된 금강계만다라의 체계와 오방불사상의 바탕에서 도상적 엄정성과 교학적 정치성을 견지하면서도 세계적으로 뛰어난 회화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結語


高裕燮은 震檀學報 第3卷에 발표한 [高麗畵跡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한국회화에서 가장 高古한 시대로부터 最一頂으로 발달한 것이 종교화이요, 그것이 가장 발전한 것이 麗朝라 했다. 그리고 1935년 당시에도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던 그림들을 열거하고 있다.
고려불화는 한국불화에서도 가장 심오한 신앙적 세계를 보여줄 뿐 아니라 한국전통회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단일 장르에서 이토록 首尾一貫된 도상성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종교예술의 예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토록 엄정하기 짝이 없는 화엄교학을 바탕으로 엄격한 도제적 수련과 고승의 지휘하에 이루어지는 불화가 이처럼 회화적으로 완벽한 조형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불교예술만의 차원이 아니라 신라와 삼국을 비롯한 오랜 전통과 확고한 사상적 토대 위에 펼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수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오늘날 보존하지 못했고 우리의 손으로 연구하며 재평가하여 세계에 알리지도 못했다. 현재 알려진 133점의 불화 중에서 한국에는 11점이 소장되어 있을 따름이며 그것도  湖巖美術館 6점, 湖林美術館 1점 및 國立中央博物館 소장의 羅漢圖를 비롯한 4점에 불과하고 보면 국가적인 관심 역시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머지 그림들은 미국 11점, 도이치 3점, 프랑스 2점이 분산되어 있을 뿐 모두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나아가 고려불화가 오늘날 그만큼이라도 세계에 알려진 것이 1978년 일본에서의 전시회에서 비롯된다니 재삼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국내 고려불화 연구의 열악한 환경으로 이어져 몇 몇 학자들의 의욕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은 대개 작품의 물리적인 분석, 인상적인 기술, 양식의 도식화 등에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현실에 착안하여 이 연구는 미술의 불교가 아니라 불교미술이라는 본연의 접근방식에 따라 불교의 교리와 사상이라는 정신사적 방향과 문화사적 시대상황에서 재조명한다는 방향을 설정한 바 있다.
먼저 한국불교의 큰 흐름인 화엄사상과 선종의 주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고려불화에는 정토사상이 압도적이라는 분석결과에 착안했다. 내우외환과 전란이 잦았던 고려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정토왕생하리라는 염원과 기원이 정토사상 및 정토화의 조성으로 이어졌으리라는 가정은 많은 연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 세가에 1천 여회 기록된 불교행사와 밀교적 의례에도 불구하고 고려불화에 밀교도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 첫 번째로, 정토사상으로 분류되었던 관음화가 대부분 화엄사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것은 34점의 관음화에서 1점의 밀교계 도상인 千手觀音圖를 빼고 보면 대부분 화엄경 입법계품 및 보현행원품의 善財童子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義湘의 洛山 觀音연기설화를 도상화한 것으로 생각되는 雙竹과 동해용왕 등의 존재는 관음의 補陀洛伽山 淨土를 상징하는 바위와 달, 請觀音經에서 유래하는 楊柳에도 불구하고 화엄사상의 도상화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의상은 한국화엄의 개조로서 화엄사상의 바탕에서 미타정토사상을 동시에 고취했기 때문이다.
이어 觀音菩薩은 勢至菩薩과 함께 阿彌陀佛의 挾侍로서 왕생자를 아미타정토로 인도하는 來迎聖衆으로서 도상화되었음에 착안하였다. 그런데 세지보살은 아미타팔대보살도에서 地藏菩薩과 동시에 그려지기도 하지만 아미타삼존도에서는 지장보살로 대체되기도 했다. 지장보살은 중생이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지옥중생을 지옥에서 구한다는 사상에서 아미타불의 극락내영과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즉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 및 지장보살은 모두 아미타정토사상이라는 동일한 근거에서 아미타삼존, 혹은 아미타팔대보살에 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고려불화의 아미타여래도에 華嚴經의 普賢行願品과 阿彌陀八大菩薩圖에서 普賢行願贊이 명기되어 있으므로 고려불화에 있어서 아미타도의 사상은 화엄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銘文을 통하여 왕공귀족을 포함한 상류층 고려인들은 아미타 극락왕생의 사상을 보현행원이라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고려불화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는 정토왕생류 도상의 대부분이 화엄사상에서 유래했거나 연관이 있다는 점이 입증된 셈이다.
또한 아미타여래도에는 비로자나불이나 불보살의 위신력을 상징하는 대인상이 그려지는데 그 중에서 卍字는 비로자나불의 광명변조, 혹은 태양과 같은 위신력, 나아가서는 태양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불교의 상징처럼 정착된 만자는 원래 전통사상에서 태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불교의 普化應同의 포용력이 전통사상을 융섭하되 盧舍那佛을 중심으로 하는 法界人中像, 毘盧遮那佛의 蓮華藏世界가 펼쳐지게 되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이 비로자나의 덕을 표상한 것이라는 澄觀과 宗密 등 화엄가들의 주장대로 아미타불이 중심이 되는 극락정토와 화엄사상과의 연관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나아가 고려불화에 문양의 형식으로 도입된 전통적인 상징도안들, 이를테면 삼족오, 달토끼, 십장생 등은 조상의 제사나 方術과 불교의 의식 및 범패 등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고려인들의 신앙태도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전통사상에서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으로 분류되는 신앙의 대상들은 불교에서 화엄신중과 공유될 수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신중에서 자연과 연관이 있는 신중들 가운데 山神, 河神, 伽藍神, 道場神 등은 선종의 발달과 함께 山中寺刹과 磨崖佛 등을 포함하는 이를테면 曼茶羅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판단되었으며 그 표상적 사상체계로서 신라의 오대산사상이 대두되었다.
오대산 사상은 金剛界五佛을 연상케하는 전통신앙의 五方思想을 바탕으로 중 毘盧遮那와 文殊, 동 觀音, 남 地藏, 서 彌陀, 북 釋迦의 오방불을 배대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불화를 논하면서 오대산 사상을 거론하는 것은 오대산 오방불의 배치가 고려불화의 분포와 유사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고려불화 역시 彌陀, 觀音, 地藏, 釋迦 및 華嚴의 毘盧遮那 등이 중심이 되는 분포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려불화의 이 분포가 일본인들의 수장취향보다는 무작위 표집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유전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고려불화에서 전시대인 신라의 오대산 사상이라는 원형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消災祈 , 護國道場 등의 밀교적 의례에 보다 치중했던 고려인들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사상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대산 사상이 화엄이라는 굳건한 교학체계를 바탕으로 國王長壽와 君臣和合, 百穀豊饒, 百姓安泰라는 현실적인 이익을 초기밀교적인 세계에서 구축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보아, 8세기에 형성된 오대산 사상이 13-14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던 고려불화의 원형일 수 있는 배경은 8세기 당시 신라의 불교사상이 오대산 사상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국사의 가람배치와 해인사 및 오대산 적멸보궁의 입지 및 신라화엄교학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義湘의 華嚴一乘法界圖 등에서 당시 신라 화엄사상의 굳건한 체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를 통하여 고려불화의 사상성과 그 원형을 화엄사상과 그 화엄사상이 만개했던 신라 당시의 시대정신의 입장에서 조명하려는 시도는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이 논문에서 당연히 다루어져야할 것으로 믿어지는 작품의 사상 및 양식의 분석은 고려불화의 화엄사상성을 천착한다는 논문의 근본 취지를 희석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학위논문 이후의 연구를 기약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려불화의 연구라는 테마의 근본적 제약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우선 도상의 절대부족과 그나마 국내에서 연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제약이다. 그러면서도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연구의 성과가 세상에 알려지고 고려불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을 수도 있는 도상들이 발굴될 가능성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루어졌던 고려불화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미술사적인 연구와 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적 연구로는 새로운 작품의 발굴 및 대중적,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전시와 논문 등의 활동 및 멀티미디어, 인터넷 등을 통한 지속적이고 선구적인 체계화 작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발표된 작품들의 연대측정, 누락된 화기 및 명문의 판독, 도상과 양식의 시대적 분류 등이 첨단 과학과의 연계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며, 이 논문의 미래진행적인 연구로 이어질 것으로 믿어진다.

끝---

출처:화이트칼라 | 2006.07.11 14:15:33 | 내 블로그 담기
적조월   고려불화의 위대함은 매스컴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욱 관심을 가진다고 합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고려불화, 앞으로 언제까지 더 잘
보존될 수 있을지 우리문화를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_()_
[청암]
2006.07.11 18:46:51
25교구   안녕하세요. 적조월님! 고려불화에 대해선 관심이 많이 있답니다.
연구해볼 분야로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저는 고려불화속에 수많은 문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시간되는 대로 정리해 볼 참이죠.... _()_
2006.07.12 11:18:07
스팸댓글 또는 악의적인 댓글의 제한을 위해 사찰에서 블로그를 개설하신 후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1
Today 2 Total 4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