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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 받들다 보니 어느덧, 50년 ...

photo지난달 26일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 염화실에서 문화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원택스님. 이곳은 성철스님이 평소 머물렀던 공간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 M 인터뷰 - ‘성철 열반’ 30주기… 20여년 시봉한 제자 원택스님



“나이가 몇이고. 스물아홉? 인생 다 살았네. 니 고마 이제 출가해라. 부처님 뜻을 공부해 깨달음을 얻는 것도 큰일이다. 내가 아무나 중 되라고 하지 않는다.”

50년도 더 된 얘기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고자 외무고시에 매진하던 청년에게 웬 꼬장꼬장한 중년의 도인이 대뜸 새 인생 살아보라며 건넨 말이다.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비울 겸 가야산에 올랐다가 더 큰 번민을 안고 산을 내려온 청년은 겨우내 밤잠을 뒤척였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참선에 소질이 있나’ 하는 생각에 이듬해인 1972년 1월 다시 산에 올라 도인을 은사 삼아 깨달음의 길로 나선다. 한국 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을 지낸 퇴옹당 성철(性澈·1912~1993) 대종사와 상좌(제자) 원택(79)스님의 사제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달 26일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만난 원택스님의 50여 년 전 기억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한테나 출가하라고 하시더만”이라며 멋쩍은 듯 웃은 그는 “시간이 이쯤 지났으면 나도 큰스님처럼 대도인이 될 줄 알았건만, 큰스님이 말씀하신 ‘몽중일여’(夢中一如·꿈속에서도 낮과 똑같이 화두가 들리는 경지) ‘숙면일여’(熟眠一如·잠이 깊이 들어서도 화두가 생생하게 들리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세수(世壽·속세의 나이)로 80세의 불교계 큰 어른인데도, 감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올랐던 스승에 대한 경외와 존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출가 후 21년간 성철스님을 시봉(侍奉·모시어 받듦)하며 얻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효(孝)상좌’란 별명 그대로의 모습이다.

원택스님은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드는 매년 이맘때 가장 분주하다. 3일이 성철스님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열반에 든 지 30년이 되는 올해는 더욱 특별하다. 지난달 30일부터 나흘간 4만8000배 철야 참회법회를 이어간 해인사에선 3일 열반 30주기 추모다례제를 봉행했는데, 원택스님은 늘 그렇듯 올해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과정을 살뜰하게 챙겼다. 그는 “큰스님을 만났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할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면서 “그래도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것에 대해 ‘할 만큼은 했구나’ 하는 자부심을 이제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출가해 큰스님을 모신 게 20여 년이고, 열반에 드신 후 30년이란 세월을 보냈는데, 앞뒤 생각할 것 없이 오로지 큰스님을 받든다는 생각을 하니 50년이 지나 있었다”고 했다. 한국 현대 불교의 가장 유명한 고승이 남긴 무거운 이름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삶이 원택스님만의 참선이고 수행인 셈이다.

photo성철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원택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누더기 승복을 걸친 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남긴 성철스님은 누구나 아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다. 다만 은둔 수행자였던 그의 수행 철학이 불교계에 뿌리내리기까진 원택스님의 노고가 컸다. 선(禪)과 교(敎)를 통합한 성철스님의 ‘중도’ 개념이 담긴 ‘백일법문’을 책으로 펴낸 게 시작이다. 이후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학술세미나와 출판사업으로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전했고, 최근엔 성철스님이 오래전 깨달음을 얻었던 옛 스님들이 남긴 선문(禪門) 정법을 모아 출간한 ‘선림고경총서’를 전자책(e-book) 형태로 무료 배포했다.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 이후 주류 수행법이 된 ‘돈오점수’(頓悟漸修·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인 수행으로 완성함)를 반박해 큰 반발을 샀던 성철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의 깨달음으로 수행을 완성함) 수행법은 이제 한국 불교 철학의 또 다른 길이 됐다. 원택스님은 “생전에 큰스님의 철학의 깊이가 잘 알려지지 않다 보니 감히 산속에 있는 중이 보조국사를 들먹인다며 비판을 받았다”면서 “이제는 돈오돈수가 한국 불교의 수행법을 논할 때 돈오점수와 함께 거론되는 새로운 산맥이 됐다. 이제 ‘할 만큼은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50년 넘게 시봉하면서 불같은 성정으로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큰스님의 뜻을 거스른 적은 없지만, 단 한 번 고집을 밀어붙인 적이 있다. 성철스님 입적 후 해인사에 조성한 사리탑이다. 해인사 입구엔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데, 큰 규모와 독특한 모양은 한국 불교계에서 회자되는 사건이다. 넓은 터를 왜 성철스님 사리탑에 쓰냐는 반대에도 밀어붙인 사리탑은 재일 설치미술가인 최재은 작가의 설계로 구(球)와 반구(半球)로 구성된 파격적이면서 현대 조각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원택스님은 “기존 사리탑이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 국보·보물을 답습했단 점에서 새로운 문화의 창조가 아니지 않았느냐”며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모습을 추상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큰스님이 하라는 대로 했으면 저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만약 큰스님께서 보셨다면 당장 뽑으라고 야단을 하시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계종 총무부장을 비롯해 중앙종회 의원,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 등을 맡아 불사(佛事)를 이끌고 종단 최고 품계인 대종사를 품수 받을 정도로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어른이 됐지만, 원택스님은 여전히 큰스님의 가르침을 먼저 내세운다. 이날 그는 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가르침을 묻는 질문에 “속이지 말고 스스로에게 솔직하라”는 말을 내놨다. 1971년 성철스님을 처음 만나 받은 좌우명 그대로다. 원택스님은 “함께 공부하는 친구를 따라 해인사에 갔다가 만난 큰스님께 좌우명을 내려 달라고 하니 ‘절돈 3000배를 내놔라’고 하시며 3000배를 시켰다. 그때 큰스님께서 ‘속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해 처음엔 실망스러웠다”면서 “나중에 문득 ‘남이 아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말이로구나’ 하는 가르침이 머리를 때렸다”고 말했다.

원택스님은 또 “큰스님께서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정치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풍류가 없고 본받을 어른이 없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면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를 비롯해 젊은 세대가 어떤 세대보다도 똑똑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움을 강조하는데 이런 젊은 세대가 잘 커나가려면 솔선하고 모범이 될 선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어른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이 본받을 것을 종교인이 준다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큰스님의 가르침을 모은 선림고경총서를 디지털 시대에 맞게 전자책 형태로 공개한 것도 우리가 선량하게 살아가는 데 마음이 모아지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hoto지난달 26일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서 만난 원택스님이 30주기 기념 국화로 꾸민 성철스님의 사리탑 앞에 선 모습.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그림자처럼 수행한 ‘성철철학’ 산증인… ‘시봉 이야기’는 베스트셀러로

■ 원택스님은…


원택스님은 한국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인 성철스님을 21년간 곁에서 시봉한 상좌로,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성철스님의 수행 철학을 배운 산증인이다.

1944년 대구에서 출생해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원택스님은 1972년 성철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수계했다. 외무고시를 함께 준비하던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들른 해인사에서 처음 성철스님을 만나며 불가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3000배를 하면 인생의 가르침을 주겠다는 성철스님에게 “절값이 너무 비싸지 않으냐”고 대들었다가 호통을 듣고 1만 배를 하게 된 원택스님은 ‘속이지 말라’는 좌우명을 받은 후 크게 깨달아 출가하게 됐다. 원택스님은 “큰스님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그 말씀을 당신의 삶에 그대로 투영하셨다”고 말했다.

성철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성철스님의 철학을 학술적으로 조명하고, 친딸인 불필스님과 함께 성철스님 생가터에 겁외사를 창건하는 등 기념사업에 주력했다. 성철스님을 기억하며 쓴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는 불자를 넘어 일반 대중도 읽는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었다.

성철스님이 머물렀던 해인사 백련암 바깥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며 불사를 이끌었다. 조계종 총무부장과 제10·13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하며 종단 발전에 기여했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본부장을 맡아 2018년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국 불교계를 대표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종단 안팎에서 50년간 정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에 품수됐다. 원택스님은 성철스님이 오랜 세월 머물렀던 백련암에 기거하며 성철스님이 남긴 1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지키고 있다. 새롭게 책들을 보관할 장경각을 짓는 동시에 후학들이 참고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원택스님은 “큰스님은 평생 내게 떠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나 역시 다른 곳에 가서 배우고 온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서 “여전히 큰스님을 모시고 못 다한 책임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 자료제공 : 문화일보 *




  • 찬불가, 자비의 나라, 조계사합창단  / 전체화면으로 보세요.






  • 2023.11.03 13: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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