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쓰러졌다는 것은 방금 전까지 서있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지금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방금 전까진 평온한 상태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의 크기는 그동안의 평온함의 기간이나 양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일 텐데 그 난관에 닥친 상태의 우리
심정은 지금의 고통이 세상의 전부 인듯 생각한다.
그 전까지의 행복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
이 미혹한 판단력이 중생심의 통상적인 한계이다.
이 얼마나 유치원생 같은 수준의 상황 판단능력인가!
책속의 글씨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글씨 자체 때문에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을 제외한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백들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백이 없다면 글씨는 존재하지 못한다.
만일 여백 없는 곳에 글이 써있다 해도 우린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하얀 여백이 없는 책장은 먹물(어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우리의 초점은 글씨에 가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 눈이 갖는 사물 인지순서를 엄밀하게 나눠보면 우리의 시선은 먼저 여백에 가있고 그 다음에 글씨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글씨의 개념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낱말의 가치와 의미는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즉, 아무런 개념과 뜻이 없는
여백(無 , 空)에 있다.
그렇다고 글씨는 아무런 가치가 없느냐면, 그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단지 여기서는 우리의 인지능력의 편협성, 그 집착성을 말하는 것뿐이다.
여백은 글씨가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 어떤 개념도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있게 하는 바탕 이 된다.
즉 글씨의 초석이다. 즉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모태(母胎)가 된다.
생(生)은 사(死)를 바탕으로 한다.
생과 사가 반대 개념이며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둘은 글씨와 여백과 같은 관계에 있다.
눈치빠른이는 이 비유와 설명이 불교의 핵심교리들과 닮아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둘이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단지 가능할 때는 우리의 생각, 관념, 이미지, 즉 허상일 때만
가능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실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둘의 상호관계를 떨어뜨리고 존재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이런 것이 실상의 진정한 의미가 된다.
열반(涅槃)은 번뇌를 바탕으로 한다.
번뇌를 떼어내야 열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 번뇌를 없애야 하는, 그런 접근 방식으론 돌장승이 애를 낳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생은 고(苦)다.’ 그러나 그 ‘고(苦)’가 열반이다.
무한한 ‘열반’의 여백위에 ‘고(苦)’의 글씨가 새겨진 것뿐이다.
고(苦)만 보지 마라.
아니 엄격히 말해 고(苦)를 인식하기전에 시선이 먼저 인지했던 여백, 즉 열반(涅槃)이 있음을 인정하라.
고(苦)를 없애고 열반에 이르려 하지 마라. 그런 길은 없다.
글씨를 통해 그 글씨가 여백위에 있음을 알듯, 고(苦)를 통해 그 바탕이 열반(涅槃)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지금 넘어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 지금 넘어짐의 바탕이 서있었음을 깨닫고, 이 순간 넘어짐에만 머물러있는 집착심에서 탈피하여 그보다 수만배 큰 행복의 바탕세계를 인지하게 하는 마음에 눈을 떠라.
그리고 내 앞에 장애가 올때 마다 이런식의 인지작용을 연습하라.
그러면 그 순간이 행복이다
그대여!
지금 고통스러운가?
삶이 괴로운가?
나도 고통스럽다.
나도 외롭다.
하지만 난 안다. 위 현상들의 상관관계를.
그래서 지금 그것을 삶(현실의 고난)을 통해 확인하여 증장(蒸長)시키고 있는 중이다.
상식에 맞으면 실천하는 부지런함이 자신의 삶의 질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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