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차 한잔 사오너라
지난 1963년 봄, 나그네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 안거하고 있을 때 군대 입영영장이 나왔다.
이는 나그네를 어찌하면 좋을지 몹시 망설이게 했던 실로 난감한 소식(?)이었다.
나그네는 먼저 경주 불국사 석굴암을 찾아갔다. 밤을 지새우며 간절히 발원하였다.
결국 모든 것을 저버리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제방에 계신 선지식을 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다짐했다.
인근의 통도사와 범어사를 거쳐 전국의 여러 큰스님들을 찾아 뵙고 공부하는 법을 여쭈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때 부산 대각사에는 설봉(雪峰)선사께서 주석하고 계셨다. 설봉 스님은 『선문촬요(禪門撮要)』와 『염송(拈頌)』등을 번역하고 강의하신 눈 밝은 선지식이었다.
나그네가 설봉 스님을 찾아뵙고 공손히 인사를 드리자, 스님은 대뜸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 않는가!
"곡차 한잔 사오너라. "
"큰스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소주 한 병 사오라는 말이다. "
"큰스님! 소주가 술이지, 무슨 곡차입니까? "
"자네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
"큰스님! 그럼 무엇이 하나며, 무엇이 둘입니까? " "자네, 밥 먹지 않으면 배고프지? "
"네, 그렇습니다. "
"자네가 밥 먹은 것하고 내가 곡차 마시는 것하고, 같은가 다른가? "
"…… "
나그네는 기가 막혔다. 스님께서는 이미 얼굴에 취기가 감돌고 있는데도 한 점 흩으려짐 없이 법문을 계속하였다.
손가락으로 술집만 가리켜도 5백생 동안 손 없는 과보를 받는다고 수계식 때 듣던 법문이 생각났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을 찾아 구도행각을 통해 결국 지혜의 눈을 떴다는 설화도 문득 떠올랐다.
나그네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동안 온갖 고정관념 속에 살면서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것만을 줄곧 옳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 더하기 둘은 셋 뿐 만이 아니라, 4도 되고 5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1+2=3 "이다.
확 트인 허공 중에 한 점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만물의 본성(本性)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 인연 따라 그때그때 그 모양새를 달리한다.
같은 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
하기에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로만 보인다 하지 않았던가!
원효(元曉) 대사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신 후 드디어 마음의 눈을 뜨고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心生故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가지가지 법도 사라진다(心滅故種種法滅) "고 했다.
오늘따라 "선악(善惡)이 다 나의 스승이 된다 "며 무애행(無碍行) 속에 고고히 살다 가신 설봉 노스님이 그립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난 것처럼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순간순간 구도의 행각인 만행(萬行)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현호 스님 / [마음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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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승 성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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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차는 취하고 어떤차는 안취하는 차 어떤차는 먹는차이고 어떤차는 못먹는차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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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2: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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