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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頂 스님과 길상화 보살

 

 

향락의 상징 ‘대원각’을 청정도량으로…무주상보시 전형

 

가난에 내몰린 기생의 삶
시인 백석의 연인 되기도
전쟁 후 요정 대원각 운영


법정 스님 ‘무소유’에 감화
천억원대 부지 사찰로 시주

 

▲ 1997년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합장한 길상화 보살(맨 왼쪽)과 법정 스님. 사진제공 맑고향기롭게.


가난은 갑작스레 닥친 악재였다. 열 여섯, 아직 어린 소녀에겐 가난한 행복보다 조금 불행하더라도 풍족한 삶이 차라리 나았다. 부유한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집안은 건재했다. 1932년 무렵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재산을 모조리 날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의 가족은 미처 손도 쓰지 못한 채 끔찍한 가난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가난은 서글픈 현실이었다. 따뜻하고 쾌적한 집, 그리고 풍족한 먹을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 한 몸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책임지겠어.” 가난에 내몰려 몸서리치던 어느 날, 그녀는 결심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 닿은 곳은 기생조합, 바로 조선의 권번이었다. 소녀는 그렇게 기생이 됐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난의 길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딸을 찾지 않았다. 딸이 기생이 됐다는 사실 자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 몰래 기생 한복을 입으니 마치 인당수에 끌려가는 심청이가 된 느낌이었지. 큰 절을 하고서는 아무도 몰래 한 없이 울었어. 한 평생, 단 한 순간도 그날의 그 기억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운명이었을까. 소녀는 유독 춤과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정악계(正樂界)의 대부 하규일 선생이 그녀를 눈여겨보고 문하생 겸 양녀로 받아들였다. 사라져가고 있는 한국의 전통 춤과 음악을 전승하고자 했다. 몸을 파는 것보다 차라리 재능과 웃음을 파는 것이 나았으니 그녀로써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전통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첫날부터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스승은 조금의 실수도 허용치 않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과 손끝의 움직임 하나에도 한 치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목이 쉴 정도로 노래를 하고 지쳐 쓰러질 정도로 춤을 연습했다. 눈물로 지새운 숱한 나날이 이어진 후에야, 스승은 비로소 그녀에게 ‘진향’이란 기명을 내렸다.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는 ‘진수무향(眞水無香)’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앞으로 기생의 신분으로 당면하게 될 각종 풍파 속에서도 맑음을 잃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스승은 노환으로 세연을 접었다.


세월이 또 다시 흘렀다. 스물 둘, 한창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운 그녀에게도 새로운 인연이 닿았다. 첫사랑이자 평생의 연인 백석이었다. 당시 백석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를 졸업한 인재이자 촉망받던 시인이었다. 둘은 첫눈에 반했다. 아니 백석이 그녀에게 푹 빠졌다. “이제부터 당신은 평생 나의 마누라야.” 스물 여섯의 백석이 스물 둘의 진향에게 굳게 약속했다.


기생 진향에겐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백석은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을 따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줬다. 서울에서 함께한 2~3년간의 시간 동안두 사람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부부가 될 수 없었다. 기생이라는 신분이 걸림돌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이길 수 없었던 백석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자야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창창한 앞날에 짐이 되긴 싫었다. 백석은 자야를 설득하지 못한 채 홀로 만주로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연락이 끊어진 채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면서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자야는 한평생 백석을 잊지 못했다. 80세 백발이 되어서도 그를 그리워했다.


“그가 떠난 뒤 한참 지나 후회를 했지. 하염없이 그리워하다가 34세 무렵에는 공부에 푹 빠졌어요. 중앙대 영문학과에 입학해 하루 12시간에서 18시간씩 공부를 했어. 다시 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만큼 열심이었지. 사랑도, 사람도 떠나가고 공부로 쌓은 지식만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홀로 남은 그녀는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악착같이 일해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이름을 ‘김숙’으로 바꾸고는 본격적인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5년, 사업가 ‘김숙’은 당시 배밭골이라 불리던 성북동 인근의 이만 평 대지를 매입했다. 매입가만 무려 650만원,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녀는 인연이 닿아 있는 모든 연줄을 활용해 가까스로 650만원을 마련했다. 어렵사리 땅을 소유하게 됐지만 욕망의 후유증은 깊고 길었다. 그녀는 무려 17년간 빚을 갚아야 했다. 필요할 때마다 땅을 떼어 팔다보니 2만평 부지가 어느새 7000평만 남았다.


부지는 줄었으나 돈을 벌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김숙은 이 곳에 목조건물을 짓고,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열었다. 1970년 삼청터널이 개설되고 성북동이 개발되면서 대원각에는 고위 정치인과 재력가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정권의 중심에 선 이들은 대원각의 밀실에서 향락을 즐기며 정치적 만남을 가졌다. 대원각은 한식당의 외관을 갖춘 요정이었다.


1970년대 밀실 정치가 극에 달한 무렵에는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삼대 요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권력가나 재력가가 아니면 문턱조차 넘을 수도 없을 정도도 대원각의 위세는 대단했다. 대원각이 요정정치의 대명사로 권력의 중심에 머물던 시기, 그녀는 본격적으로 재산을 불리기 시작했다. 나날이 쌓여가는 재산에도 정작 가슴 한 켠은 시리고 허전했다. “부귀도 영화도 다 부질 없었어. 모든 게 백석의 열정 담긴 시 한 줄만 못했지.”

 

 ▲ 기생 ‘진향’시절의 길상화 보살(왼쪽)과 공덕비.


1980년대 무렵 그녀는 돌연 대원각 운영을 접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김영한(1916~1999). 오래도록 잊고 있던 본명이었다. 열여섯 집을 떠난 후 기생 ‘진향’으로, 백석의 ‘자야’로, 또 사업가 ‘김숙’으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본명을 되찾은 셈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후 대원각은 이경자라는 40대 여사장이 임대해 고깃집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1983년 2월경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 일간지에 이 여사장이 조세법 위반 및 탈세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일제히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사장은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대원각을 계속해서 임대해 운영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리고 1987년의 어느 날, 대원각의 소유주 김영한 여사는 심경의 변화를 맞이한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다가 불현듯 대원각을 시주해 사찰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법정 스님이 말하는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에 깊이 매료됐다. 대원각은 당시 시세로 무려 1천억 상당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김영한 여사의 지인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김대도행 보살이 법정 스님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테니 도심 속 열린 사찰로 만들어 스님이 관리해 주세요.”


“일평생 주지 같은 일은 맡아본 적도 없을뿐더러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적합하지 않습니다.”


법정 스님은 김영한 여사의 간곡한 청을 일시에 거절했다. 대원각을 사이에 둔 법정 스님과 김영한 여사의 줄다리기는 거듭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꼬박 10년이 지난 1996년, 법정 스님은 비로소 그녀의 청을 받아들인다. 대원각을 시주받아 청정도량으로 변모, ‘맑고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삼자는 이들의 요청이 이어진데 따른 것이다.


그렇게 술과 고기, 성과 향락, 밀실정치의 대명사였던 대원각은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는 청정도량 ‘길상사’로 탈바꿈했다.

 

▲ 과거 대원각의 본채, 지금은 극락전으로 변모했다.

 

1997년 2개월간의 공사 끝에 질펀한 놀이공간이던 대연회장은 설법전으로, 본채는 극락전, 고기냄새와 음악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은 열린 시민선방으로 거듭났다. 한복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의 숙소는 수행하는 스님들의 요사채가 됐으며,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불음을 전하는 범종각으로 거듭났다.


대원각의 변신은 당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1천억원대에 이르는 7000여평 대지와 임야를 무주상 보시한 김영한 여사, 그리고 거듭된 사양 끝에 시주를 받아들여 조계종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로 등록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한동안 불교계 안팎에 떠들썩하게 회자됐다.


1997년 12월14일 봉행된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법정 스님은 김영한 여사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감사의 표시로 염주 한 벌도 건넸다. 길상화 보살은 서툰 합장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속내를 밝혔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더더욱 불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사찰이 들어서고 마음 속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저의 남은 한으로 이 절의 종을 한껏 치고 싶을 뿐입니다.”


1999년 11월, 세상을 떠나기 6일전 KBS 영상에 담긴 길상화 보살은 더없이 편안한 얼굴이었다.


“옛날 생각은 할 필요도 없어. 벌써 모두 잊었지. 과거도, 가진 것도 모두 내려놨어. 돌려주거나 보시한 것이 아니야. 그냥 내려놓고 버린거야. 이제야 다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참 편해요.”


길상화 보살은 임종을 하루 앞두고 길상사를 찾았다고 알려진다. 오랜 병환으로 지치고 노쇠한 모습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정갈한 한복 차림이었다. 길상화 보살은 법당을 참배하고 천천히 경내를 둘러본 후 경내 자신의 처소 ‘자야오당’에 누웠다. 그리고 “죽은 뒤 반드시 화장해서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어느덧 여든을 넘어선 나이. 세월의 풍파 속에 까맣고 탐스럽던 머리는 희게 바랐고 뽀얀 복숭아 같던 얼굴에는 자글자글 주름이 자리했다. 가난에 내몰려 기생이 된 열 여섯 살의 진향은 백석의 연인 자야로, 또 사업가 김숙에서 본명 김영한으로 폭풍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불교에 귀의한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이름은 바로 길상사 창건공덕주 ‘길상화’보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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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3 19: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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