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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운이 노 거사에게...

 

제가 죽고 살지는 알 수 없으나 (병을) 떨치고 일어나기는 아직 요원합니다. 더 오래 살라고 축하의 선물을 보내주신 거사님 후의에 그저 부끄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과거 숙업에 이끌려 한 세상을 물결치듯 흘러왔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쇠잔하기 그지없는데 오히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은 많기만 합니다.
매번 문득문득 떠올릴 때마다 헛된 이름만 낸 것은 아닌지 부끄럽습니다. 지나온 한평생도 어찌 보면 꿈이고 허깨비일 따름입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의 시작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얼른 정신을 차려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일심으로 공부해 가야합니다. 어느 여가에 세속 사람들 하는 일을 흉내 내겠습니까.
어머님께서 날 낳으신 날의 고통조차 애달피 여길 겨를조차 없으니 절대 일을 벌이지 마십시오. 이는 큰 죄업을 쌓는 일로 부질없이 손해만 있을 뿐 조금의 이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허운(虛雲, 1840~1959)이 손 거사 등 재가자에게 보낸 편지를 뒤늦게 접한 잠학려(岑學呂, 1882~1963)는 가슴이 미어져왔다. 스승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고통 받는 스승을 위해 120세 기념행사조차 열 수 없다는 심한 자책감 때문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합리주의자이자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잠학려. 불교를 미신에 불과하다고 여기던 그가 독실한 불자가 된 건 오로지 스승 허운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 잠학려는 동북의 군벌인 장학량과 뜻이 맞지 않아 떠나던 중 우연히 복주(福州) 고산(鼓山)을 방문하게 됐다. 그곳에는 90세가 넘는 큰 도인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경치도 대단히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신반의하며 고산 용천사(湧泉寺)를 찾은 잠학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 거기에 일본의 침략까지 이어지면서 사찰이 파괴되고 먹을 게 부족해 스님들마저 파계하거나 절을 떠나는 일이 속출했는데 이곳은 완전히 달랐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생사에 초탈한 1500여명의 스님들이 죽 한 그릇에 생사를 건 정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운을 만난 잠학려는 순간 그 힘이 이 한 명의 노승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직감했다. 큰 키에 바짝 마른 체구, 10년은 훨씬 넘었을 허름한 옷을 걸쳤건만 그의 온화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는 그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었다.

딱히 갈 곳이 없던 잠학려는 당분간 용천사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러면서 제자들로부터 듣게 된 허운의 삶은 또 한 번 그를 놀라게 했다. 모친은 벌건 살덩어리를 낳고 놀라 숨지고 다음날 지나던 한 의원이 그 살덩어리를 가르고 꺼낸 아이, 19세에 출가해 동굴에서 6년간 풀과 솔잎으로 연명하고 정진했고 손가락을 태워 깨달음을 얻고자 했으며, 10여 년간 전국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참선수행과 경전을 익힌 열렬한 구도자였다는 것. 또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보타락가산에서 오대산에 이르는 장장 4000km를 폭설과 홍수 등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3년간 삼보일배로 완주했고, 티베트·인도·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 불교성지를 걸어 참배했던 고행자. 뿐만 아니다.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곤명(昆明) 인민들을 위해 3일간 기우제를 드려 마침내 단비를 내리게 했고, 온갖 동물들의 불법에 귀의토록 하는 도인 등 그의 고난과 이적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었다.

동서양 철학에 정통했던 잠학려가 처음부터 이런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뒤 열린 대규모 수계식 때 허운이 법단에 오르자 대웅전 앞 늙은 매화가지에서 갑자기 사발만한 꽃 수십 송이가 피어나고,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계단에 온순하게 엎드리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다른 얘기들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잠학려를 감동 시킨 건 허운의 깊은 지혜와 자비, 계율에서 한 치 어그러짐이 없는 행동이었다. 허운은 어떤 음식이 들어오건 대중과 함께 공양했고 누군가 좋은 옷을 보시하면 그 즉시 주변에 나누어주었다. 또 그는 사람이건 동물이건 곤충이건 언제나 온화하게 자비로 대했고, 누군가 법(法)을 물으면 짧되 한 마디 한 마디 정성껏 답변해 모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잠학려는 허운으로부터 계를 받고 관현(寬賢)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리고 스승의 지도로 참선과 경전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나 간혹 들려오는 산문 밖의 소식은 그로 하여금 스승의 곁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고 조선을 침탈한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년간 용천사에 머물던 그는 스승의 안타까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하산해 곧 정부의 일에 참여했다.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던 잠학려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언어를 정리했고 그 후 언론사에서도 근무했으며, 나중에는 광동성의 임시주석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은 전란에 휩싸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의병대를 조직해 일본에 대항했고 결국 나중에는 일본군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때 잠학려가 떠올린 게 스승이었다. 당시 스승은 곡강(曲江) 남화사(南華寺)에 상주하며 무너져가는 선종수찰의 재건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잠학려는 스승을 만나볼 것을 결심하고 일본군의 눈길을 피해 험한 산길을 가로질렀다. 환갑을 넘긴 그에게 이 길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그는 스승과 마주했다. 그저 말없이 바라보던 스승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도록 하오.”
“…호남(湖南)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 가야합니다.”
백세를 넘긴 노스승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대가 수십 년간 돌아다녀서 무엇을 얻었느뇨, 무엇을 얻었느뇨.”

순간 잠학려는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눈코뜰새 없이 살아온 세월들, 인민들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순간 뜬구름 같고 부질없이 느껴졌다. 자신도 구제 못하면서 진정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 하는 허탈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학려에게는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스승에게 정성껏 절을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문을 나섰다.

이후 제자는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살았고, 스승은 전쟁으로 굶주리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며 살았다. 특히 스승은 그 와중에도 손문(孫文), 임삼(林森), 장개석(蔣介石) 등 자신을 찾아온 저명인사를 불교로 이끌었고 크고 작은 수많은 사찰의 불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1949년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공산당의 중국본토 승리가 확실시됨에 따라 대륙 곳곳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잇따랐다.

홍콩으로 건너간 잠학려와 제자들은 허운을 공산정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모시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스승은 그 때마다 완곡히 거절했다. 잠학려는 허운이 지금까지 법문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음을 떠올렸고, 허운의 제자 도륜과 함께 다른 거사의 이름으로 전보를 쳤다. 홍콩 반야정사에서 법당 점안식 법문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예상대로 스승은 참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1949년 여름 스승은 110세의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왔고, 그를 보기 위해 기차역은 수만 명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모두들 중국 최고의 선지식 “허~운”을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법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불사금도 당시 돈으로 3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모였다. 허운은 이를 스러져가는 사찰들과 빈민들을 위해 쓸 것을 당부했고, 잠학려와 제자들은 스승을 뜻을 받들 것을 약속했다. 이어 잠학려는 스승에게 간곡히 말했다.

“스님, 대륙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시면 생명까지도 위험합니다. 부디 홍콩에 머무시면서 불법을 널리 전해주십시오.”
“나 개인적으로는 머무르고 떠나는 것에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어디든 고향이요, 짐을 풀면 그곳이 도량이지요. 그러나 대륙의 사찰들은 모두 파괴될 위기에 처해있고 수많은 승려와 불교도들도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비록 미력하더라도 고난에 처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야지요. 죽더라도 대륙의 불교도들과 생사를 같이 할 생각입니다. 해외포교는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그 누구도 허운의 강경한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스승은 함께 왔던 시자조차 남겨 두고 다만 지팡이에 의지해 맞은편에서 밀려드는 행렬을 뚫고 고난의 땅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그러한 스승의 모습을 지켜보던 잠학려 등 제자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잠학려와 허운의 마지막 만남이기도 했다.

잠학려가 우려했던 대로 곧 대륙에서는 거센 피바람이 불었고 사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당한 후 한국전쟁에 내몰렸고, 나이든 승려는 공사장으로 끌려갔다. 사찰은 파괴되고 소임을 맡았던 스님들은 혹독한 자아비판을 당해야 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출가자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다. 그리고 1951년 봄, 마침내 운문사에 ‘혁명의 피바람’이 불어왔다. 피땀으로 일군 전각과 불상은 한 순간에 파괴되고 승려들은 참혹하게 죽어갔다. 허운 또한 그들에게 쇠몽둥이로 머리를 비롯한 온몸을 두들겨 맞고 눈, 코, 입, 귀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는 참변을 당해 9일간 죽음의 경계를 헤매야 했다.

허운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잠학려는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수백만의 제자들과 연대해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에 로마교황 등 세계 각국의 종교지도자들과 태국 국왕, 베트남 총리, 인도 네루 수상도 허운의 석방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허운을 석방하도록 했다.

잠학려가 대륙에서 허운의 제자 승진(勝進)으로부터 두툼한 종이뭉치와 편지 한통을 받은 것도 이 때다. 편지에는 스승이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었고 이후 여러 제자들이 스승의 생애를 들러주기를 요청했다는 것, 이에 허운이 자술한 기록과 법어, 시 등을 비밀리에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스승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난에 잠학려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이 마지막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자료를 다시 검토, 보완해 『허운화상연보(虛雲和尙年譜)』를 펴냈다. 이를 계기로 허운이 더욱 유명해지자 공산정권은 이를 이용하려 중국불교협회 초대회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허운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오히려 모택동에게 종교탄압을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허운은 공산정권의 끝없는 감시 하에서도 승가를 보호하고 수십 곳의 가람을 복원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어 불문에 귀의토록 했다. 특히 폭력과 살육에 맞서 자비와 인내로 끝까지 맞설 것을 당부했으며, 만년에는 염불운동을 적극 펼치기도 했다.

공산당의 자아비판 요구에 “부처님의 대자비를 널리 알리지 못해 부끄럽고, 많은 중생의 고통을 돕지 못한 채 늙어버려 부끄럽고, 지금 화남(華南)에 큰 수해가 발생해 모두들 기근에 시달림에도 돕지 못함이 죄스럽다”며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묻어나던 허운. 120번 째 생일이 지난 얼마 후인 1959년 10월 13일 “계정혜를 부지런히 닦고 탐진치를 소멸하라. 도량을 보존하고 사원의 청규를 지켜가려면 오직 한 글자뿐이니 바로 계(戒)다”란 말을 남기고 그는 부처님이 그랬듯이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운 채 입적했다.

한편 잠학려는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연보를 보완해 개정판을 출간했으며, 스승이 간지 4년 뒤인 1963년 82세로 파란만장한 세연(世緣)을 마쳤다.


2018.05.28 10:17:36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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